나무를 배우며 거듭나는 삶을 이뤄내자 | 숲이 사람을 살린다

나무를 배우며
거듭나는 삶을 이뤄내자


신준환
동양대학교 산림비즈니스학과 교수



우리는 나무를 보면 곧잘 근본을 생각한다. 우선 제사상에 밤이 오르는 이유로 근본을 들기도 한다. 밤나무가 한참 자라도 땅을 파보면 뿌리에 밤껍질이 그대로 붙어 있다. 그래서 밤나무는 자신의 싹이 튼 근본인 밤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으니 조상을 기리는 제사에 밤을 올리며 우리 인간도 우리를 낳아준 조상을 잊지 말고 근본을 잘 지키자고 다짐하는 상징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밤나무 입장에서 관찰해보면 밤나무는 근본을 지키기 위해 밤껍질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밤나무가 씨앗에서 자랄 때 밤나무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생장 조절 기능은 새로 자라나는 싹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새로 난 싹에서 눈이 형성될 때 생장 조절 기능은 밤나무의 줄기나 뿌리에서 눈으로 이동해 그 이듬해 새순이 자랄 때 다시 눈으로 옮겨간다. 생장 조절 기능은 이렇게 계속 이동해 늘 나무의 지엽말단(枝葉末端)이 간직한다. 밤껍질은 미생물의 생장에 방해가 되는 타닌(tannin) 성분이 많아서 썩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일 뿐이다. 이렇듯 알고 보면 원래 나무의 근본을 줄기나 뿌리가 영구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새 눈으로 옮겨가서 새로 자라는 가지와 잎으로 펼쳐지니 나무의 근본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 자라나는 과정으로 펼쳐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나무의 생장 과정을 잘 이해하면 지구에서 아름답게 펼쳐온 생물 다양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문제가 어렵지 않고 늘 거듭나는 우주 과정의 이해도 무척 쉬워진다. 생물 다양성이나 우주는 원래 전개되어야 할 근본 방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 태어난 세계의 관계에서 다음 세계가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생물 다양성이 미생물에서 하등 생물로 진화하고 하등 생물에서 고등 생물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미생물 역시 인류를 포함한 모든 동물과 식물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 진화한 것이다. 세계는 늘 이렇게 전체가 거듭나고 세계를 구성하는 개체도 전체의 관계 속에서 거듭난다.

오백 년 된 나무는 오백 살의 기억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오백 년 된 나무도 오늘의 바람과 햇살과 비와 관계를 맺고 최근에 길어 올린 물질로 몸을 구성하고 오늘을 살고 있다. 오래된 큰 나무라고 뿌리에서 줄기로 정통성을 확보하고 굳건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얇은 세포층인 형성층이 물관과 체관을 새로 만들어내며 새로운 관계를 맺고 잎과 가지 그리고 새 눈의 새로운 관계를 펼쳐내는 것이다.

우리도 어제의 기억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오늘 내가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오늘 새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어릴 때의 기억은 두뇌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그런데 잊은 것은 잊은 것도 모르니 나는 온전히 나란 정체성을 지니고 나의 근본을 보전하며 변함없이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몸도 겉보기처럼 그대로 이어져온 것이 아니다. 음식을 먹고 배설하며 끊임없이 갈아치우며 새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몸과 마음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진다고 느낀다. 이것은 마치 바다에 치는 파도가 해변으로 물을 몰아온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파도가 친다고 바닷물이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바닷물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파동이 전달될 뿐이다.

의식도 흐르는 것이 아니다. 의식은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의식이 과거에서 현재로 흘러와 미래로 이어진다고 착각하며 우리의 기억에 집착한다. 이 흐름이 끝나는 것은 두렵다.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두렵다. 어떻게 될지 몰라서 더 두렵다. 우리는 점점 더 있지도 않은 불안을 재생산하며 공포에 떤다. 그래서 우리의 아집은 영원히 살아가려고 욕심을 부린다.

사실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태어나고 죽는다. 삶은 죽음과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탄생과 죽음의 관계이다( 『나무의 일생, 사람의 마음』, 신준환, 그물, 2021). 나무는 잎이 져야 다시 살아난다. 사람도 의식이나 기억이 자기를 계속 붙들고 있으면 살 수 없다. 아니 죽음보다 더한 저주일 것이다. 그런데 의식은 일어났다 사라지며 파문을 일으키고 잔영을 남긴다. 사라짐에 대한 불안, 무지에 대한 불안은 이 잔영을 붙잡는다.

더구나 의식이 나의 전부가 아닌데도 나는 나의 의식이 나의 전부라고 의식할 수밖에 없다. 이는 의식하는 존재의 한계이지만, 안타깝게도 의식의 잔영이란 허깨비가 정작 나를 노예로 부리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아집은 의식의 파문이 일으킨 잔영을 받아서 마치 파도 연결의 착각처럼 우리의 삶이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것으로 고집한다. 대나무가 꽃이 피면 죽는다는 것을 많이 알고 있다. 그런데 나무를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나무에서 생장점에 꽃을 피운 가지는 다 죽는다. 꽃이 피는 의미는 새로운 세계를 준비한다는 뜻이다. 나무는 늘 거듭나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흠모하던 분이 돌아가셨다고 너무 깊은 슬픔에 빠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따뜻한 몸의 기운을 주고받을 수 없고 대화를 할 수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분은 어디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세계로 거듭난 것이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분의 숨결이 있고, 내가 살아갈 길에 그분의 생각이 있다. 이 모든 것들과 함께 우리가 거듭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신준환
서울대학교 산림자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립수목원 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동양대학교 산림비즈니스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다시, 나무를 보다』, 『나무의 일생, 사람의 마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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