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불교 | 전쟁

전쟁과 불교


윤종갑
동아대학교 철학생명의료윤리학과 조교수


전쟁은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사방에 피가 고여 있어”…‘그알’ 우크라이나 전쟁, 학살자와 목격자

국경 탈출 우크라이나 국민 503만 명…1,300만 명은 ‘전쟁’ 속에 갇혀 살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침공, 러시아 핵무기 사용 우려하는 젤렌스키


위의 내용은 헤드라인으로 뜬 인터넷 뉴스 제목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전쟁의 참상과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져가고 있다. 미처 탈출하지 못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강간과 살인이 난무하는 무법천지의 공포 속에 갇혀 살고 있으며, 전쟁이 장기화됨으로써 핵전쟁으로 인한 세계 3차 대전을 우려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느 때처럼 생활한다. 전쟁은 우리와 전혀 무관한 남의 일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세계 역사를 돌이켜보면 전쟁은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된 것으로 어느 지역, 어느 시대, 어느 국가를 불문하고 지금까지 계속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동족상잔의 6·25를 겪은 분단국가이며, 지금도 북한은 공공연히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전쟁의 위협 속에 있다. 가장 도덕적이고 이성적이라는 인간이 가장 비도덕적이고 비이성적인 전쟁을 그것도 인류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1차 대전과 2차 대전이라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치르고도 중단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의 종말을 염려하는 핵전쟁의 단두대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왜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인류 전체를 멸망시킬 수 있는 전쟁을 인간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불교에서의 전쟁, 피할 수 없는 인과법[연기법]의 결과

불교에서는 전쟁의 발생이 인과법[연기법]의 결과이며, 개인의 삶이 그러하듯 한 국가의 운명도 과보로 인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개인적인 행복과 불행이 개인의 과보[個人業]로 인한 것이듯 국가적인 평화와 전쟁 역시 그 국가의 과보[共業]의 결과이다. 따라서 자신의 불행을 3독[탐욕·분노·무지]을 제거해 벗어나듯이 국가의 전쟁과 같은 재난도 그 국가를 구성하는 공동체의 3독을 제거함으로써 평화를 회복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불교 경전 여러 곳에 나타나는 것으로, 자신의 과보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전쟁 역시 인과법의 결과이다. 이러한 사실은 붓다가 겪었던 부처님 당시의 전쟁 상황과 참상을 보면 생생히 드러난다.

우리는 붓다가 그 좋은 왕권을 버리고 왜 출가 고행을 했는지 의문을 갖기도 한다. 물론 깨달음이 첫 번째 동기가 되었겠지만,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다를 바 없는 당시 인도의 여러 강대국[16대국]과 약소국[10여 개국] 사이의 전쟁의 참상을 일찍이 경험한 어린 왕자로서 왕권의 수행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마가다(Magadhā)와 코살라(Kosalā) 같은 강대국 사이에서 언제 침공을 당해 멸망할지 모르는 약소국 카필라국(Kapila Vastu)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사실이 그의 출가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며, 코살라의 침공으로 자신의 조국 카필라가 멸망하는 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붓다는 왕이 되어 국가를 다스린다는 것은 결국 죽고 죽이는 전쟁의 참상을 피할 수 없는 길임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붓다는 당시 인도의 가장 강대국이었던 코살라국으로부터 세 번의 침공을 받았는데, 두 번은 왕(Vidudhabha)을 대화로써 설득해 돌려보냈지만 세 번째는 더 이상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끝까지 싸우자는 제자들에게 “나는 남에게 해를 입혀서 지켜질 수밖에 없는 왕국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하며 아무런 저항 없이 조국의 멸망을 받아들인 것이다. 붓다는 코살라국의 침략과 카필라국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연기법의 결과임을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전쟁은 전쟁이 아닌 오직 자비로써 해결할 수 있다

붓다는 전생에 물고기였던 비두다바왕[코살라국]을 석가족[카필라국]이 마구 잡아먹은 그 업보로 카필라국이 침략을 당하게 되었으며, 만약 전쟁을 치르게 되면 석가족은 살육의 고통을 받게 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승복을 해 그 과보를 수용함으로써 업장을 해소하고 살생의 고통을 피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증일아함경』 34, 「등견품(等見品)」 2에 생생하게 나타난다.

제자 목건련이 붓다를 찾아와 자신의 호신술로 적군을 모두 물리칠 수 있다며 전쟁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붓다는 설령 적군을 물리칠 수 있더라도 과거에 지은 전생 인연은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자 목건련은 카필라성을 허공으로 옮기거나 그 지붕을 새장처럼 쇠로 엮어 보호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붓다는 그렇게 하더라도 결코 전생 인연을 옮기거나 덮을 수 없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연기법의 엄정함과 절대성을 가르친 것이다. 적군의 침략을 수용하며, 붓다는 목건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석가족은 이제 전생의 인연이 이미 다 무르익었다. 이제는 그 과보를 받아야 하느니라.” “비록 저 허공을 땅으로 만들고 또 이 땅을 허공으로 만들려 해도 과거의 인연에 묶인 그 인연은 영원히 썩지 않느니라.”


전쟁 방지와 국가 번영을 위한 다섯 가지 정책

전쟁과 국가의 운명이 연기법의 결과라면, 국가를 어떻게 운영하면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국민들이 살 수 있을까. 붓다의 말년 무렵 당시 강대국이었던 마가다국의 왕 아자타샤트루(Ajātaśatru)가 밧지(Vajji)족을 정복하고자 할 때에 붓다에게 사신을 보내어 자문을 구하는데, 그때의 붓다의 답변 속에 전쟁과 국가의 번영에 대한 입장이 명확히 드러난다. 붓다는 전쟁을 방지하고 번영한 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정책을 강조한다.

첫째, 소통과 화합[일치단결], 둘째, 법의 제정과 준수, 셋째, 윗사람에 대한 존중과 공양, 그리고 약자[부녀자]에 대한 배려, 넷째, 영지(靈地)에 대한 참배, 다섯째, 존경받을 만한 이들에 대한 공경이다. 붓다는 이 다섯 가지 정책이 제대로 실행된다면 국가가 안정되고 번영해져 쉽게 침략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결코 패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전쟁이 발생하더라도 최대한 살생과 파괴를 막아 전쟁의 과보를 더 이상 받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불살생계와 전쟁부정론

불교는 불살생계를 계율[오계]의 첫 번째로 내세울 만큼 생명의 소중함을 중시하는 종교이다. 즉 “모든 존재들은 폭력을 무서워하고 모두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자신을 비교의 기준으로 삼아 스스로 죽이거나 다른 사람을 시켜 죽여서는 안 된다.”(『법구경』) 따라서 계율에서는 행위자가 직접적으로 살생하는 것과 남을 시켜서 살생하거나 죽음을 용인 내지 권유하는 간접적인 살생 등을 모두 금하고 있다. 생명체의 범위는 사람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대상으로 한다. 『숫타니파타(Suttanipāta)』의 『담미카경(Dhammika Sutta)』을 보면 붓다는 그 어떤 계율보다 불살생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스스로 생명을 죽이지도 말고, 남을 시켜서 죽이지도 말라. 그리고 죽이는 것을 용인하지도 말라. 그것이 약한 것(tasa)이건 강한 것(thāvara)이건 살아 있는 이 모든 존재자에 대한 폭력을 거두어야 한다.


위의 『담미카경』에서도 나타나듯이 살생을 전제로 하는 전쟁은 불교의 입장에서는 결코 용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전생의 과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전쟁이 발생하더라도 최대한 살생과 폭력을 막아 생명을 보호하는 자비의 실천이 중요하다. 칼에는 칼이 아닌 자비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중국의 티베트 침공에 대해 비폭력으로 맞선 티베트 승려들이다.

인도의 역사에서 찾아보면 인도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통일했던 아소카(Asoka: 268~239 BCE)왕은 통일 왕국을 건설한 후에 불교에 귀의함으로써 칼[전쟁] 대신 법[불법]으로 통일 왕국을 다스렸다. 조류와 동물의 사냥을 법령으로 금지했으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복지를 펼침으로써 전륜성왕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이러한 자비행은 불교가 세계 종교가 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아소카왕은 불교에 귀의했지만 불교를 국교로 제정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사상과 종교를 존중하고 인정하며 자비와 지혜로써 국가를 다스렸던 것이다.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부르고 자비는 더 큰 자비로 이어지는 것이 불교의 연기법이다. 하루빨리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한 모든 전쟁이 이 지상에서 사라져 온 인류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



윤종갑

부산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철학 박사) 동경대학교에서 박사 후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동아대학교 철학생명의료윤리학과 조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공과 실재, 그리고 깨달음』, 『한국 불교 사상의 특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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