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종교의 닮은꼴 | 전쟁

전쟁과 종교의 닮은꼴


박규태
한양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전쟁 없는 세상을 살고 싶어 하지만, 그 꿈은 늘 배반당하기 일쑤이다. 전쟁은 인류 문명의 시작과 함께 줄곧 있어왔고 지금도 우리 바로 옆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전쟁’과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종교’가 의외로 상호 깊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당혹케 한다. 우리는 역사상 수많은 전쟁들이 종교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매우 민감하고 복합적인 주제인 ‘전쟁과 종교’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공통분모가 많다. 실로 전쟁의 역사와 종교의 역사는 함께 진행되어온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쟁과 종교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전쟁과 종교의 닮은꼴은 상반되는 가치가 모순적으로 존재하는 양가성의 차원에서 더욱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 평화를 만들어내는 종교가 있는가 하면, 전쟁을 촉발하거나 지지하는 버팀목으로서의 종교도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종교의 양가성이다. 한편 전쟁을 발전과 진보의 촉진제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에도 전쟁은 분명 인간의 가장 위대한 업적물들을 멸절시킬 수 있는 재앙임에 틀림없다. 나아가 전쟁의 양가성은 무엇보다 전쟁에 내재된 가장 심각한 ‘폭력성’에 종종 ‘신성성’ 또는 ‘성스러움’의 의미가 부착되어왔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전쟁의 양가성은 이른바 ‘종교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전쟁에서 가장 극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역사상 종교의 차이라든가 기타 종교적 이유로 인해 발생하거나 촉진된 종교 전쟁이 적지 않다. 가령 중세 십자군 전쟁을 비롯해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빈번하게 일어난 크고 작은 종교 전쟁들의 사례는 수없이 많다. 또한 발칸반도의 보스니아와 코소보 내전을 비롯해 20세기 말 이래 종교 전쟁의 성격을 띠는 분쟁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 전쟁들은 흔히 말해지듯이 종교 혹은 종교적 가치의 왜곡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전쟁의 특수한 한 형태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고대로부터 전쟁과 종교의 관계에 있어 폭력과 성스러움의 연계는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사실상 전쟁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가장 편리하고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폭력(전쟁) 그리고 가장 강력한 비폭력 모두가 종교적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전쟁과 종교라는 주제가 안고 있는 극적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아이러니에 주목한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폭력이야말로 종교의 기원이며, 따라서 종교적 희생의 성격을 띠는 폭력이 적극적인 사회적・심리적 기능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의례의 형태를 취하는 종교의 상징적 폭력은 공동체 성원에 대한 적대감의 분출을 허용함으로써 사회적 결속을 증진시키며, 이때 소수의 희생양에게 폭력을 집중시킴으로써 훨씬 더 큰 파괴적인 폭력을 정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작은 폭력으로 큰 폭력을 막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전쟁은 곧 축제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사회학의 창시자 에밀 뒤르켐은 전쟁이 발생하면 집합적 감정이 생기를 얻어 조국애와 당파 감정 혹은 정신적 신념이나 국가적 신념이 고취됨으로써 사람들의 시선이 동일한 하나의 목표로 집중되어 강고한 사회적 통합이 실현된다고 보았다. 그런 전쟁에서 사람들은 ‘성스러운 것’으로 치부되는 공유된 가치와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전시 혹은 전장에서 ‘성스러운 것’ 곧 종교를 가장 강렬하게 체험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전쟁은 집단적 도취를 수반하는 축제와 비슷하다. 사회학자 로제 카이와는 뒤르켐보다 더 직접적으로 전쟁을 종교적 축제에 비유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개인의 독립성이 부정되고 사람들은 집단적 열광에 휩싸이며 마치 축제의 경우처럼 모든 도덕적 규범이 근원적으로 역전되는 위반의 세계를 살게 된다. 요컨대 전쟁과 축제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매혹과 공포의 원천으로서의 ‘성스러운 것’(종교)이 현현한다는 점에 있다. 그리하여 카이와는 “전쟁은 종교적 축제와 같다. 그것은 신들의 세계로 문을 열고 인간은 신으로 변해 초인간적 존재가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신이 된 인간은 더 이상 전쟁을 비판적으로 사유하지 않게 되며, 다만 폭력과 과잉과 분노의 시간 속으로 거칠게 내동댕이쳐질 뿐이다.

이와 같은 전쟁과 종교의 내밀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전쟁 자체가 하나의 종교적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고대 문명 속 신화와 종교의 사례들은 이런 생각을 뒷받침해준다. 가령 기원전 2,100년경의 「길가메시」 서사시는 적들을 쳐부숨으로써 자신의 결함을 극복하는 하나의 영적 여행으로서의 전쟁을 묘사한다. 거기에는 평화의 추구와 폭력에의 의존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한편 기원전 7세기의 서사시 「에누마 엘리시」에 나오는 원초적 대모신 티아마트와 최고신 마르둑의 전쟁 이야기에서 우리는 패배한 티아마트의 사체로부터 세계가 탄생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이런 식으로 인간과 우주 탄생의 기원이 신들의 전쟁에서 비롯되었다고 묘사하는 신화는 유럽과 인도뿐만 아니라 중국과 인디언 신화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에 널리 퍼져 있다. 거기서 전쟁이라는 카오스는 ‘세계 창조’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신들에게서 도덕적 모범을 구하지 않았다. 그들이 신들에게 바란 것은 전쟁에서의 승리였으며, 이를 위해 신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쳤다. 거기서 전쟁과 종교는 하나였다. 그리스 신화에서 비주류에 속했던 군신 아레스가 로마 판테온에서는 제2인자인 ‘전쟁의 신’ 마르스로 높이 숭배되었다. 3월을 뜻하는 영어 마치(March)는 바로 마르스신의 달을 뜻하는 말이다.

인도 신화 역시 종종 전쟁의 영광을 찬미한다. 인도 종교(힌두교)의 근본 경전이자 인도인들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는 신성시되는 전쟁 영웅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심지어 인도에서 영적인 자기실현의 지침서라 말해지는 『바가바드기타』조차 유명한 전쟁 장면으로 시작한다. 거기에는 전쟁 영웅 아르주나와 비슈누의 화신인 신성한 마부 크리슈나 사이의 기나긴 대화가 이어진다. 전쟁에 대해 깊은 회의를 품게 된 아르주나는 전사로서의 의무감과 비폭력의 이상(아힘사) 사이에서 갈등한 끝에 절망에 빠져 무기를 내려놓는다. 그러자 크리슈나는 그에게 올바른 대의를 위한 전쟁을 상기시킨다. 이 대목에서 크리슈나의 역할은 양가적이다. 크리슈나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도덕적 균형감각을 지니면서도 전쟁의 파국을 막으려 하지 않는다. 이 『바가바드기타』의 이야기에서처럼, 인간은 오래전부터 전쟁을 인간 삶에 있어 피할 수 없거나 어쩔 수 없는 실재 또는 현실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승인해온 측면이 있다. 고대 마야 문명과 아스텍 문명의 경우에도 전쟁은 종교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구약성서에 나타난 유대교의 윤리적 유일신관에 있어 야훼 또한 근본적으로 전쟁신이었다.

전쟁과 종교의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는 ‘의로운 전쟁(義戰)’ 및 더 나아가 ‘성스러운 전쟁(聖戰)’이라는 발상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한다. 성전으로 포장된 일본 제국주의를 직접 경험한 적이 있는 우리에게 성전의 문제는 남달리 가깝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원시 기독교는 원래 타협 없는 평화주의자의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그것이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된 이래 서구 기독교에서는 의전과 성전이라는 관념이 생겨났다. 잘 알려진 이슬람의 성전 개념인 지하드(jihad)는 오늘날 과격 테러 집단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오용되고 있는데, 원래 지하드의 개념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예컨대 지하드의 투쟁 대상은 자기 자신, 영적 능력, 거짓된 말, 유혹, 인간의 취약성, 타자의 고통과 빈곤 등 대단히 다양하다. 그래서 ‘혀의 지하드’라든가 ‘심장의 지하드’라는 표현도 있다. 많은 무슬림들은 호전적인 성전 개념보다 오히려 이런 유의 내면 지향적 지하드를 ‘더욱 위대한 지하드’로 이해한다. 실제로 이런 내면적 지하드 개념이 대다수의 무슬림들의 삶에 널리 받아들여져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상에서 살펴본 전쟁과 종교의 공통점과 관련해 끝으로 한 가지 더 첨가할 것이 있다. 유일한 해답이 없는데도 종종 절대적인 해답 체계처럼 보이는 것, 그것이 종교이고 전쟁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지금 정말 필요한 것은 유일한 해답이 아니라 올바른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아닐까? 따라서 전쟁과 종교의 관계에 있어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끊임없이 던져보아야 하지 않을까? 종교는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폭력적인 갈등을 정당화하며, 폭력을 정당화하는 종교의 강력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종교 중에는 더 호전적인 종교가 있는가? 전쟁은 단지 종교의 원칙을 잘못 적용한 결과일 뿐일까? 어떻게 전쟁이 종교의 원칙과 양립할 수 있을까? 도대체 전쟁을 종교적 의미에서 ‘신성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성스러운 전쟁’이라는 것이 과연 성립 가능한가?

박규태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석사 및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한국종교문화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현재 한양대 일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역저서로 『현대 일본의 순례문화』, 『일본 정신분석』, 『세계 종교 사상사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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