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상원사 | 사찰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오대산 상원사


문수동자와 고양이


상원사 문수전 계단 아래쪽에 있는 고양이 석상 한 쌍. 세조가 법당으로 들어 서려 할 때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옷자락을 물고 들어가 지 못하도록 했는데 알고 보니 법당 안에 자객이 숨어있었다 한다. 목숨을 구 해준 고양이를 기리기 위해 사찰에 고양이 석상을 세웠다.

세조(수양대군)는 문종이 어린 조카 단종에게 왕위를 넘기고 죽자, 김종서·황보인 등을 죽이고 단종을 몰아낸 후 왕위에 오른다. 그 후 성삼문 등 사육신을 무참히 죽이고 단종마저 죽이고 말았다. 잠자리에 든 세조는 악몽을 꾸는지 온몸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옆에 누웠던 왕비가 잠결에 임금의 신음 소리를 듣고 일어나 “마마, 정신 차리십시오.”라며 정신 차릴 것을 권하니 잠에서 깨어난 세조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 신열이 있사옵니다. 옥체 미령하옵신지요?” 세조는 대답 대신 혼자 입속말을 했다. “음, 업이로구나, 업이야.” “마마, 무슨 일이세요? 혹시 나쁜 꿈이라도 꾸셨는지요?” “중전, 심기가 몹시 불편하구려. 방금 꿈에 현덕왕후(단종의 모친·세조의 형수) 혼백이 나타나 내 몸에 침을 뱉지 않겠소.” “원, 저런….”

꿈 이야기를 하며 다시 잠자리에 들었으나 세조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린 조카 단종을 업어주던 모습이며, 생각하기조차 꺼려지는 기억들이 자꾸만 뇌리를 맴돌았다. 이튿날 아침, 이게 웬일인가. 꿈에 현덕왕후가 뱉은 침 자리마다 종기가 돋아나고 있었다. 세조는 아연실색했다. 종기는 차츰 온몸으로 퍼지더니 고름이 나는 등 점점 악화되었다. 명의와 신약이 모두 효험이 없었다. 세조는 중전에게 말했다. “백약이 무효이니 내 아무래도 대찰을 찾아 부처님께 기도를 올려야겠소.” 중전은 “그렇게 하시지요. 문수도량인 오대산 상원사가 기도처로는 적합할 듯하옵니다.”라고 말했다.

세조는 오대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월정사 참배를 마치고 상원사로 가던 중 맑고 시원한 계곡물에 목욕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신하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늘 어의를 풀지 않았던 세조는 그날도 주위를 물린 채 혼자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즐겼다. 그때였다. 숲속에서 놀고 있는 조그마한 한 동자승이 세조의 눈에 띄었다. “이리 와서 내 등 좀 밀어주지 않겠나!” 동자승이 등을 다 밀자 세조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단단히 일렀다.

“그대는 어디 가서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 그러자 동자가 “예. 그러지요. 대왕께서도 문수동자가 등을 밀어주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왕은 놀라 주위를 살피다 자신의 몸을 보니 몸의 종기가 씻은 듯 나은 것을 알게 되었다.

오대산 상원사 전경

세조는 동자를 찾기 위해 상원사뿐만 아니라 오대산 전 암자를 뒤졌지만 끝내 그 동자를 찾을 수 없었다. 세조는 환궁하자마자 화공을 불러 자신이 본 문수동자를 그리게 했다. 이름난 화공을 불러 자신이 보았던 문수동자를 설명해 동자상을 그렸는데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루는 어느 행색이 허름한 스님이 그려보겠노라 해 설명을 하니 들은 척도 않고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다 그린 그림을 보니 목욕할 때 보았던 그 동자가 틀림없었다. 치하를 하려고 다시 스님을 보니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세조는 문수동자를 두 번씩이나 친견하는 행운을 누린 사람이라 한다. 동자상이 완성되자 세조는 상원사에 봉안토록 했다. 현재 상원사에는 문수동자 화상(畵像)은 없고, 얼마 전 다량의 국보가 쏟아져 나온 목각문수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또 세조가 문수동자상을 친견했던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갈라지는 큰 길목 10km 지점은 임금이 그곳 나무에 의관을 걸었다고 해 ‘갓걸이’ 또는 ‘관대걸이’라고 부른다.

병을 고친 이듬해 봄, 세조는 다시 그 이적의 성지를 찾았다. 어의를 차려입고 기도를 드리려 막 법당 안으로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순간, 갑자기 머리가 쭈뼛해지며 불길한 느낌이 자신을 감쌌다. 그래서 법당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곤룡포 자락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옷자락을 떨치면서 고양이를 쫓았다. 하지만 고양이는 도망가기는커녕 더욱 악착스레 달려들며 옷자락을 물어 잡아당겼다. 세조는 고양이를 쫓지 않고 대신 피해 물러섰다. 그러고는 군사들에게 법당 안을 샅샅이 뒤져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법당 안을 살펴보던 군사들은 드디어 시퍼런 칼을 들고 불상을 모신 탁자 밑에 숨어 있던 세 명의 자객을 발견하게 되었고, 단숨에 그들을 잡아 문초해보니 그들은 세조를 암살하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끌어내어 참하는 동안 고양이는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한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를 위해 세조는 강릉에서 가장 기름진 논 500섬지기를 상원사에 내렸다. 그리고는 매년 고양이를 위해 제사를 지내주도록 명했다. 이때부터 절에는 묘전(猫田)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이 모셔진 문수전 월랑(月廊)에 그려진 벽화.
세조의 등을 미는 문수동자를 표현했다.

지금도 상원사에 가보면 마치 이 전설을 입증하는 듯 문수동자상이 모셔진 문수전(文殊殿) 입구 계단의 좌우에는 돌로 조각한 고양이 석상이 서 있다. 속설에 의하면 ‘공양미’란 말도 고양이를 위한 쌀이란 말이 변해 생겼다고 한다. 고양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세조는 다시 상원사를 찾았다. 자신에게 영험을 베풀어준 도량을 중창해 성지로서 그 뜻을 오래오래 기리기 위해서였다. 대중 스님들과 자리를 같이한 세조는 상원사 중수를 의논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공양 시간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들렸다. 소탈한 세조는 스님들과 둘러앉아 공양 채비를 했다.

“마마, 자리를 옮기시지요.” “아니오. 대중 스님들과 함께 공양하는 것이 과인은 오히려 흡족하오.” 그때 맨 말석에 앉아 있던 어린 사미승이 발우를 들더니, 세조의 면전을 향해 불쑥 말을 던졌다. “이거사, 공양하시오.”

놀란 대중은 모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정작 놀라야 할 세조는 껄껄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도인 될 그릇이로다.” 세조는 그 사미승에게 3품의 직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표시로서 친히 전홍대(붉은 천을 감은 허리띠)를 하사했다. 아마 세조는 지난날 자신의 병을 고쳐준 문수동자를 연상했던 모양이다. 그 후 세간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귀하게 되라는 징표로 붉은 허리띠를 매어주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월정사 일주문을 지나 반듯하게 뻗은 전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길은 천년 세월 동안 월정사를 지키고 있어 ‘천년의 숲길’이라 불린다. 여기를 지나 상원사로 향하는 ‘선재길’은 숲 명상의 길이요, 비우고 내려놓으며 걷는 최적의 힐링 공간이 되고 있다.




백원기

동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평생교육원장을 맡고 있다. 『불교설화와 마음치유』,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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