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원효 | 전쟁

전쟁과 원효


최유진
경남대학교 명예교수



원효와 그의 시대

우리나라의 대표적 불교 사상가인 원효는 진평왕 39년(617년)에 압량군(지금의 경산시)에서 태어나서 신문왕 6년(686년)에 입적했다. 높은 귀족 출신이 아니었고 도성 사람도 아니었다. 중국 유학을 가려다가 그만두어서 유학파가 아니었고 나중에는 환속해 승려도 아닌 거사 신분이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주류가 되기에는 약점이 많았지만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최고의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원효의 시대는 그야말로 전쟁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라·고구려·백제 세 나라 간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원효가 태어난 진평왕 때부터 입적한 신문왕 때까지는 전쟁에 대한 기록이 없던 때가 없을 정도이다. 그야말로 끊임없는 전쟁의 시대였다. 고구려·백제와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고구려·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는 당나라와의 전쟁이 이어졌던 것이다. 전쟁은 당나라 세력이 물러나고 통일이 완수되고서야 끝이 난다. 원효가 입적하기 10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다고 바로 평화가 찾아오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전쟁의 후유증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런 시대를 살았던 원효이기에 전쟁에 대한 그의 견해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로 생각된다.


신라 불교도의 전쟁관

신라의 불교도는 전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 전쟁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전쟁에는 절대 참여할 수 없다는 입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직간접적으로 전쟁과 관련이 있는 예들이 제법 많다. 먼저 원광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원광은 세속오계를 귀산과 추항의 두 젊은이에게 준 것으로도 유명하거니와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는 글월인 걸사표(乞師表)를 지었다. 승려로서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신하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원광의 생각이었다. 다음으로 의상의 경우도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다. 의상은 귀국하면서 당나라가 신라에 쳐들어오려 한다는 김인문의 말을 듣고 그 정보를 왕에게 보고했다. 전쟁과 직접 관계가 있는 것은 명랑(明朗)의 경우이다. 이때 쳐들어오는 당나라 군대를 명랑이 문두루비밀법에 의해서 물리쳤다는 것이다. 승려가 직접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승려가 환속해 군인이 되어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도옥은 실제사에 있던 승려인데, 중노릇을 제대로 못하니 군인이 되어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낫겠다고 해 환속해서 취도라는 이름의 군인이 되어 참전해 공을 세웠다고 한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계율로 치면 살생이라는 가장 큰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취도는 그것에 대해서 큰 갈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취도는 비록 환속했다고는 하지만 이전에는 승려의 신분이었고 이후에는 승려는 아니더라도 불교도였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살생이라는 큰 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 보답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앞서 보았듯이 승려인 명랑도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는 데 직접 참가하고 있다. 이렇듯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큰 잘못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과 원효

원효의 경우는 어떠한가? 원효도 전쟁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작전에 도움을 주었다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고기(古記)』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또 군사를 일으켜 당군과 연합하려고 김유신이 먼저 연기, 병천 등 두 사람을 보내 회합할 기일을 물었더니,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종이에 난새(鸞)와 송아지(犢) 두 동물을 그려 보내왔다. 나라 사람들이 그 뜻을 풀지 못하고 사람을 시켜 원효법사에게 물었더니, 그가 해석해 말하기를, “빨리 군사를 돌이키라는(速還) 뜻이다. 서독(書犢) 화란(畵鸞)의 반절(反切)로 속환(速還)의 두 글자를 나타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원효가 작전 암호문을 해독해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원효는 이와 같이 전쟁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전쟁에 도움을 주는 이런 행위에 대해서 원효가 큰 문제의식을 느꼈을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로 생각해서 기꺼이 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원효의 국가에 대한 태도는 앞서 인용한 원광의 태도와는 조금 다르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원광은 왕의 걸사표를 지으라는 명령에 “자기가 살려고 남을 멸하는 것은 승려의 할 짓이 아니나, 빈도(貧道)가 대왕의 나라에 있어 대왕의 수초(水草)를 먹으면서 어찌 감히 명령을 좇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고는 글을 지어 바쳤다고 한다. 모든 것이 왕의 것이라는 생각, 즉 왕의 나라에서 왕의 수초를 먹는다는 사고방식은 원효의 생각과는 다르다. 원효는 군주는 혼자 왕국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와 나라를 공유하며 잘못을 범하면 그 자리를 잃을 수도 있는 존재라고 본다. 그리고 왕은 백성을 위한 정치, 올바른 법에 의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원효의 입장이었다. 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서, 그리고 올바른 법을 위해서 협조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열반경』에서는 정법을 설한 지계(持戒) 비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무기를 들고 전쟁을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명을 끊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전쟁을 하더라도 살생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심지어는 살생을 인정하기도 한다. 즉 “중생에게는 믿음 등의 다섯 가지 근(根)이 있지만, 원래부터 불성이 없는 일천제(一闡提) 무리는 영원히 단절해버렸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개미를 살해하면 살생의 죄를 얻어도 일천제를 살해하는 자에게는 살생의 죄가 있지 않느니라”라고 해 일천제는 살해할 수도 있다고 한다. 원효는 『열반경』의 이 입장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원효는 『열반경』에 대해 『열반종요』라는 저서를 저술했는데 거기에는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없다. 하지만 원효의 입장은 이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의 말이므로 당연히 진리로 받아들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법 옹호를 위한 전쟁은 인정하는 것이 원효의 입장이고 살생도 경우에 따라서는 인정된다고 보는 것이 원효였다. 『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의 살생계에서도 원효는 살생이 복이 되는 경우가 있음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원효의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한 견해는 되도록 전쟁은 없어야 하지만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전쟁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의 경우 전쟁에서 나라를 잘 지켜야 한다고 보았다. 전쟁이 많았던 당시의 현실에서 원효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심각한 잘못이라고 본 것 같지는 않다. 그리하여 실제로 전쟁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전쟁에 도움을 주는 행위는 『범망경보살계』 중 하나인 국사계(國使戒)에 어긋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문제에 대한 심각한 고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효는 국내적인 평화의 문제, 즉 침략을 당했을 때 어떻게 외적을 물리치며 또는 어떻게 외적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지만 그 범위를 벗어나서 국제적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문제에 대한 원효의 생각을 굳이 추측하자면 정법치국(正法治國)이 원효의 입장이므로 왕들은 폭력이 아닌 정법에 따라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즉 바른 진리에 입각해 통치하는 왕은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전쟁은 부정할 것이기 때문에 정법치국이 세계 평화의 기초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최유진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남대 철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원효를 중심으로 한국의 불교 사상에 대해 연구했으며 저서로 『원효사상 연구』, 『원효 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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