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 한국의 수행처 순례

한국의 수행처 순례|5대 적멸보궁


부처님 향기, 자장율사의 

향기 그득한 곳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법흥계곡 골짜기는 입구 1km 밖부터 솔향과 더불어 2,500년의 부처님의 향기와 1,500년의 자장의 향기가 그득합니다.

눈길 닿는 곳마다 정겨운 산이고 강줄기가 굽이굽이 이어지는 영월 무릉도원면(面). 그 깊숙한 곳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수행 중 문수보살을 만나 전해 받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법흥사 적멸보궁이 있습니다. 

수천 년 동안 흘러내린 시간 하나하나를 품에 꼭 껴안고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이곳 사자산(獅子山) 연화봉 아래에 고요히 묻혀 공(空)의 가르침을 전해주고 계십니다. 적멸보궁 주련에는 자장율사가 지은 ‘불탑의 노래’가 신라의 목소리로 여전히 아름답게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두 그루 사라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드신 부처님/ 가신 지 몇 해 이런가/ 당신의 진신사리/ 이곳에 그대로 있어/ 오래오래 가르침을 설하시니/ 그 예배 끊이지 않네


부처님께서 주 활동 무대이셨던 왕사성를 떠나 고향 카필라로 향하시던 중 쿠시나가르를 지날 때 아난을 불렀습니다. 

“아난아, 몹시 피곤하구나. 히란야바티강의 저쪽 언덕 사라나무들이 있는 숲으로 가자. 그리고 저 한 쌍의 사라나무 사이에 북쪽으로 머리를 둔 침상을 만들어라. 이제 누워야겠다.”

이때의 모습을 『대반열반경』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두 그루의 사라나무에서 때 아닌 꽃들이 만개해 누우신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흩날리며 떨어지고, 하늘나라에서도 만다라 꽃들과 전단향 가루가 휘날려 사라나무 꽃들과 더불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아난아, 이러한 모습은 나 여래를 참으로 존중하고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가르침에 따라 마음을 닦고 법을 따라 행하며 머물러야 한다.”


자장은 율사(律士)라고 부릅니다. 율사란 계율을 잘 알고 지키는 청정한 승려를 말하는데 부처님께서 열반한 지 천여 년이 지난 후 동방의 한 작은 나라인 신라에서 부처님께서 제정한 율법을 제대로 공부하고 잘 지키는 훌륭한 제자가 탄생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자장도 부처님께서 왕자이셨던 것처럼 신라의 왕족으로 태어납니다. 당시 신라는 강한 모계 혈통 사회였는데 특히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던 지소 태후(진골 계통)의 손자이자 미실(대원신통)의 손자이기도 했습니다만 자장은 이러한 속세의 지대한 권력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자장율사 토굴(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09호). 가로 1.6m, 세로 1.9m로 한 사람이 앉아서 정진할수 있는 곳이다.

자장은 가파른 바위들을 병풍처럼 감싸 안고, 골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사자산 연화봉 그 어느 곳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묻고 그곳에서 정진에 들어갑니다. 진신사리를 어느 곳에 모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사자산 전체가 부처님이라고 여겨도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법흥사의 대문 격인 원음루에서 소나무가 우거진 오른쪽 길을 따라 500m 정도 오르면 적멸보궁이 객을 맞이하는데 보궁 뒤에는 자장이 수행했다고 전해지는 토굴이 있습니다. 토굴 안 평면은 입구부터 약간씩 넓어지다가 중심부에서 원형에 가깝게 되어 있다지만 지금은 축대를 쌓아 토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삼국유사』에는 자장의 수행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정신이 맑고 슬기로우며 글을 잘 지었으나 세속의 정취에 물들지 않았으며 시끄러움을 싫어해 깊숙하고 험한 곳에 혼자 살며 명상에 잠기되 피곤하면 작은 집을 짓고 주변에 가시 울타리를 둘러친 다음 그 가운데 알몸으로 앉아 조금만 움직여도 가시에 찔리도록 했으며, 머리는 들보에 매달아 혼미한 정신을 쫓았다. 마침 재상 자리가 비었는데 문벌로 보아 후임자로 마땅해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왕이 명했으나 자장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저는 차라리 하루 동안 계율을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파계하여 백 년 동안 계율을 어기면서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토록 자장은 계율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속세를 떠나 깊은 골짜기에서 은둔하며 수행하니 새가 먹이를 물어다 주는 등 신기한 일들이 벌어지고 하늘에서 다섯 가지 계율을 내려주니 이로부터 자장이 율사라고 불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을로 내려와 사람들에게 계를 주기 시작하니 신라인들이 앞다투어 받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과 지엄한 인연을 지닌 자장이 가시덤불 속에서 머리에 대들보를 이고 정진하는 모습이 법흥계곡 골짜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들어갈수록 울창해지는 소나무 숲에서 날리는 솔바람과 사계절 맑은 물이 흐르는 법흥계곡은 그야말로 자장이 그리던 불국토이자 무릉도원입니다. 

글과 사진|오서암

농부작가로 활동하며 자비를 나르는 수레꾼 봉사팀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마흔여덟에 식칼을 든 남자』가 있고, 엮은 책으로 『무여선사의 쉬고 쉬고 또 쉬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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