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 제일 가람 부석사 | 사찰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사찰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다


화엄 제일 가람 부석사


의상과 선묘 낭자 이야기



백두대간 소백산맥 봉황산 중턱에 위치한 부석사는 의상 대사(625~702)가 창건한 사찰로 해동화엄(海東華嚴)의 제일 가람이다. 화엄은 ‘모든 사물이 어느 하나라도 홀로 존재하거나 일어나는 게 아니라 서로 인연이 되고 상호의존해 있으며 그로 인해 발생한다’는 것으로 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를 핵심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이며, 생사와 열반이 서로 대립되는 현상이 아니라 원융무애하고 그러한 뜻에서 연화장세계(청정광명한 이상적인 불국토)라고 한다. 화엄의 가르침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같은 전제 왕권 국가의 정치 체제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은 삼국 통일 후 고구려와 백제 백성을 통합하기 위해 삼국의 접경지에 통일 국가의 상징물로 화엄종찰을 원했다. 이에 의상과 그 제자들은 문무왕의 성원에 힘입어 전국 10여 곳에 절을 지었는데, 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이다. 부석사는 그 화엄십찰 가운데 제1의 가람이다. 특히 고려 공민왕 친필의 편액이 걸린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봉정사 극락전의 연대가 확인되기 이전까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유명했다. 이처럼 화엄 대종찰로 귀중한 문화적 가치와 상징성을 지닌 부석사는 의상과 선묘 낭자의 고귀하고도 지순한 사랑의 설화로 여전히 세인들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의상 대사가 불교를 배우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병을 얻어 양주성의 수위장으로 불심이 돈독한 유지인의 집에 머물러야 했다. 그때 그의 딸 선묘가 의상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다. 의상의 나이 37세, 선묘의 나이 17세쯤이다. 상사병을 앓던 선묘였지만,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까지 온 의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상은 법도로 선묘를 대하자 그녀는 감화해 보리심을 일으켜 제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선묘는 신라에서 온 구법승을 남자로 품는 대신 스님으로 모시는 길을 택했다. “세세생생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 그리고 불사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어드리겠다”고 서원했다. 


선묘 낭자의 눈물이 고여 만들어졌다는 선묘정으로 추정되는 부석사 경내의 우물

선묘의 정성으로 몸을 완쾌한 의상은 다시 길을 떠나 종남산 지상사에서 화엄종의 2대 종주인 지엄 화상에게서 화엄학을 10년간 공부했다. 그런데 의상은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급거 귀국하는 길에 선묘의 집을 찾았다. 하지만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선묘는 외출하고 집에 없었다. 의상은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선묘를 만나지 못하고 배로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선묘는 의상 스님에게 전하고자 준비해두었던 법복을 담은 상자를 챙겨 산둥성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버렸다. 선묘는 스님에게 공양하려는 지극한 정성으로 멀리 떠나가는 배를 향해 법복이 담긴 상자를 던지며, “원컨대 이 비단이 의상 대사님께 이르도록 해주옵소서” 하니 순간 회오리바람이 일어 상자를 밀고 나아가 배 한가운데 앉아 있는 스님 앞에 떨어졌다. 그리고는 선묘 자신도 용이 되고자 축원을 하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얼마만큼 떠내려가던 몸이 갑자기 용으로 화신해 의상 스님이 있는 배로 갔다. 그리고 사랑하는 임이 무사히 신라에 도착할 수 있도록 호법 용이 되어 스님이 탄 배를 호위하게 되었다. 스님이 탄 배는 황해 가운데 이르러 큰 태풍을 만나 높은 파도에 휩쓸렸다. 하지만 선묘는 용으로 화신해 의상의 배를 호위해 무사히 배가 남양 포구에 도착하도록 했다.

이와 같이 선묘는 의상 곁을 지켰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와 화엄사상을 선양하기 위해 부석사를 창건할 때도 선묘의 사랑은 그 위력을 발휘했다. 의상이 부석사를 지으려고 할 때 그곳에는 약 500명의 이교도들이 있었다고 한다. 선묘는 다시 의상의 꿈에 나타나 이교도들을 제압할 방법을 일러주었다. 다음 날 아침 의상은 선묘가 시키는 대로 지팡이를 한 번 두들기니 커다란 바위가 공중에 떠올랐다 내려앉았다. 용으로 화신한 선묘가 신통력을 발휘해 커다란 바위가 공중을 날아다니도록 한 것이다. 이를 두 번, 세 번 이어서 반복하자 겁을 먹은 이교도들이 일제히 의상 대사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한 후 그곳을 떠났고, 의상은 무사히 절을 지을 수 있었다. 

무량수전 서쪽 산비탈에 있는 공중에 세 번이나 뜨게 했다는 바위 ‘부석(浮石)’

공중에 세 번 뜬 바위가 무량수전 서쪽 산비탈에 있는 ‘부석(浮石)’이다. 조선 후기 문인 이중환은 『택리지』에 “아래 위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뜬 돌(浮石)임을 알 수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부석사는 선묘라는 한 여인의 사랑으로 탄생한 사찰이다. 지금도 무량수전 옆에 부석이 남아 있어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한 여인의 사랑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선묘는 부석사가 창건된 이후에도 석룡(石龍)이 되어 화엄 도량을 수호했다고 한다. 석룡의 머리는 법당을 향하고 있으며, 꼬리는 석등까지 이어졌다 한다. 크기가 48척이 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지난 1967년 학술 조사단이 무량수전 앞뜰에서 5m가량의 석룡 하반부를 발견했다. 석룡이 된 선묘는 사랑하는 임이 법당에서 독경을 할 때도, 제자들에게 법문을 할 때도 그를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렸기에 눈물이 고여 우물이 되었을까? 오늘날에도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연인들은 이곳 선묘정(善妙井)을 찾는다고 한다. 

선묘 낭자 이야기는 막연히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송나라 찬영 등이 편찬한 『송고승전』에 당송 350년 동안의 고승 533인의 이야기 속에 의상 대사와 선묘 낭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걸 보면 선묘의 의상 스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마음과 그 힘으로 절을 지을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사 입구에서부터 끝의 무량수전까지 많은 돌계단으로 이루어진 부석사는 그야말로 중중무진 연기의 화엄 불국토를 가장 잘 구현한 사찰 가운데 하나다. 특히 격조와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안양루는 한국 사찰 건축의 백미다. 이 입구에 서면 중간중간 사이에 새겨진 ‘오방불의 화현’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착시 효과로 무량수전과 안양루 사이의 빈 공간이 보여주는 묘미다. 천하의 절경을 품은 안양루에서 펼쳐지는 소백산을 바라보면 마음이 탁 트이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힐링의 순간을 맞게 된다. 



백원기 

동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평생교육원장을 맡고 있다. 『불교설화와 마음치유』,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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