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과학의 세계
대자유와 과학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불도는 자유를 위한 가르침이다. 헛된 집착을 내려놓아 고뇌로부터 자유로운 길로 우리를 이끈다. 윤회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열반에 이르기를 희망하는 이들이 걷는 길이다. 몸과 마음을 얽매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비롯된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대자유를 추구한다. 그런데 독자는 불교의 위없는 자유가 끊임없는 부정(否定)의 작업을 통해 얻어진다는 진리를 알고 있을까? 어떤 것도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니라고 부정하며 그것에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작업이 불도의 길임을 알고 있을까?
붓다의 무아(無我)는 나를 나이게끔 속박하는 고정불변한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유의 가르침이다. 아트만이나 영혼 그리고 참나와 같이 내게 딱 달라붙어 나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것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나를 구속하는 영원불변의 나로부터 나를 해방시키는 가르침이다. 불교 교리의 근간을 이루는 연기(緣起)는 세상 만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지속·소멸한다는 통찰이다. 어떤 것도 다른 것들로부터 고립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진리다. 연기는 사물이 고정불변의 독립된 실체라는 견해를 부정하면서, 우리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사물이 서로 이런저런 방식으로 연결되어 변화하는 자유로운 상태에 있다고 가르친다.
연기의 가르침은 대승의 공(空)으로 이어져, 스스로 존재하지 않아 스스로를 스스로로 만드는 고정불변의 자성(自性)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결론에 이른다. 다시 말해 공은 만물에 자성이 존재함을 부정하는 진리이고, 이런 부정의 작업은 만물을 고정불변의 자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대승의 공은 자유의 가르침이다.
중도(中道)도 양극단을 부정하면서 얻는 자유다. 수행론으로서의 중도는 고행과 나태를 모두 비판하고 부정하면서 양극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중도에서만 깨닫고 열반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한편 대승에서 전개된 존재론으로서의 중도는 만물이 자성을 가지고 상주(常住)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 단멸(斷滅)의 상태에 있지도 않다는 통찰이다. 만물이 상주와 단멸이라는 양극단을 부정해 얻는 자유로운 상태로 존재한다는 진리를 말한다.
불교는 연기와 공의 진리에 어긋나는 영원불변 불멸이라는 절대 신과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불자는 그런 신과 고정불변의 답답한 영혼으로부터 자유롭다. 불자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 또한 ‘모든 번뇌의 불길이 꺼져 있는 상태’로서, 부정의 작업을 통해 얻어진다. 집착을 부정해버리고 수행에 정진하며 고통의 삶을 떠나 고뇌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지향한다.
독자는 이런 끊임없는 부정의 작업이 혹 우리를 부정 그 자체에 집착하게 만들지 않을까 질문할지 모른다. 그런 문제는 없다. ‘부정’은 실재하는 존재자가 아니고 단지 개념적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8세기 칸트가 이미 부정을 그의 12개 범주의 하나로 포함시켜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틀이나 개념으로 간주했다. 부정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독자는 과학도 부정의 작업을 통해 발전하며 진정한 과학자는 특정 이론에 고정되어 머물기를 거부하며 자유를 추구하는 일종의 수행자임을 알고 있을까? 어떤 이론이 언제나 옳다고 검증만 된다면 과학이 아니고, 원칙적으로 비판되어 부정될 수 있어야 과학이라는 철학의 논의를 들어보셨는가? 지난 몇 세기 동안 과학의 눈부신 성과에 감명받다 보니 과학은 영구불변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이들마저 있지만, 과학은 결코 완성된 체계가 아니다. 과학은 합리적 비판으로 끊임없는 부정의 작업을 통해 자유로이 이루어지는 지적(知的) 작업이다.
먼저, 부정될 수 없는 주장이나 이론은 과학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보시라. ‘당신은 내년에 동쪽에서 온 귀인을 만날 것이요’라는 사주풀이를 예로 들어보자. 이 예측이 반증될 가능성이 있는가? 동쪽에 사는 사람은 지구 인구의 반이다. 실은 지구가 둥그니까 결국 모든 사람이 동쪽에 산다. 그리고 귀인의 기준은 너무도 모호해서 이 세상 모든 이가 귀인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사주풀이 주장 또한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원칙적으로 반증이 불가능한 주장은 과학으로 인정될 수 없다.
칼 포퍼는 점성술과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정신분석학을 사이비 과학이라며 비판했다. 마르크스주의를 재조명해보면 변명으로 일관해 비판을 피했던 이론이다. 19세기 중반에 살았던 칼 마르크스는 서구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구조적으로 모순이라며 곧 붕괴하리라 예상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서구가 식민지를 착취하며 체제를 유지했다고 방어하며 곧 멸망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런 일도 없었다. 그들은 또 서구가 두 차례 세계대전을 일으켜 전쟁터에서 잉여생산물을 소비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일시적으로 해소했다고 변명했다. 그런데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지들이 독립했어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흥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또다시 서구가 다국적 기업을 통해 다른 나라를 착취하며 버틴다고 변명했다. 이렇게 끝없이 변명하다가 결국 서구가 아닌 소련과 동구권 공산 체제가 붕괴했다. 마르크스주의처럼 반증을 거부하는 체계는 과학이 아니다.
비판을 통한 부정의 작업을 받아들이지 않는 점성술이나 공산주의는 과학이 아니고, 따라서 과학처럼 발전할 수도 없다. 그런데 태양이 지구를 돌지 않고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주장한 지동설에 주목해보라. 수천 년 동안 불변의 진리라고 받아들여졌던 천동설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그 반대의 길로 과학적 작업을 진행한 사람이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였다. 또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2,000년 동안 굳게 믿어졌던 행성의 궤도가 원형이라는 지식(?)을 부정하고 그 궤도가 타원이라는 점을 관찰하고 또 수학적으로 풀어낸 천문학자들이 튀코 브라헤와 케플러였다. 이들 모두 기존의 과학 이론을 부정하고 그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 새로운 가설의 체계로 나아갔던 사람들이다.
너무도 완벽해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여겨졌을 법한 뉴턴의 역학조차 아인슈타인에 의해 극복되었다. 뉴턴이 주장한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을 부정하며 시공간이 분리될 수 없는 물리량이라는 그의 상대성이론은 기존 이론에 대한 비판과 부정 그리고 그를 통해 얻은 자유를 바탕으로 새로이 창조되었다. 과학은 기존의 것을 여의려는 끊임없는 비판과 부정의 작업을 진행한 다음, 새 가설 여럿을 찾아 모아 새 이론의 체계로 나아가는 자유로운 창작의 과정이다.
새 이론이 성공적이어서 과학자들의 집단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이것은 아직 반박되어 부정되지 않아 잠시 받아들여진 이론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영원히 고정불변해 불멸인 과학 이론이란 존재한 적도 없고 또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모든 이론은 끊임없는 비판과 부정의 작업을 잠시 견뎌내고 있는 가설의 체계에 불과하다. 조만간 그 체계가 가진 문제점이 드러나서 폐기되고 새로운 가설이 등장하게 된다. 과학은 머무르지 않고, 과학자는 자유롭다.
과학 이론도 다른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가설이 모이고 흩어지며 탄생하고 폐기된다. 이런 이합집산(離合集散)의 과정은 과학자들의 부단한 비판과 부정의 작업으로 촉진되며, 이합집산이 잦을수록 과학은 더 빨리 발전한다. 과학은 태도다. 특정 내용을 가진 이론의 총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비판과 부정을 통해 자유로이 새 가설로 옮겨가려는 방법을 지칭한다. 말하자면 집착하지 않고 떠나보내 자유로워지려는 태도가 바로 과학이다.
불교에서 부정의 작업은 이 세상 모든 것에서 집착을 여의게 해 수행자에게 궁극의 자유를 가능케 한다. 이런 자유가 해탈이고 열반이다. 과학은 비판과 부정의 작업을 통해 어떤 이론에도 집착하거나 머무르기를 거부한다. 어떤 이론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부정의 작업은 과학에도 자유를 가능케 한다. 이 자유가 과학 발전의 원동력이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과 무아』, 『불교는 생명과학과 어떻게 만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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