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과 돈오 | 불교와 과학의 세계

과학혁명과 돈오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리는 과학 지식이 점진적 축적 과정을 통해 이룩되어왔다고 생각한다. 오랜 옛날부터 지식이 조금씩 모여서 자연의 작은 부분을 설명하는 가설이 만들어졌을 것이고, 그런 가설이 증명되고 체계화된 이론들이 점점 모여 자연의 더 많은 부분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포괄적인 과학이 완성되었다고 믿는다. 그런데 우리 상식과 달리 과학은 이렇게 점진적 과정을 통해 성장하지 않는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당시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진 톨레미의 천동설로부터 점진적 개선 과정을 거쳐 탄생하지 않았다. 지구가 고정되어 있다는 전제 아래 천체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천동설을 아무리 갈고닦아도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이 나오지 못한다. 근대 천문학은 천동설의 전제를 완전히 뒤집어 움직이는 것은 태양이 아니라 지구라는 새로운 전제를 받아들이는 ‘혁명적’ 변화를 거쳐 완성되었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뀐 변화는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을 정반대로 바꾼 극적인 과학혁명이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그 이전 2,000여 년 동안 지속된 생명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기계론적 설명으로 바꾸었다. 다윈은 생명체와 종(種)이 주어진 완벽한 목적을 향해 발생하고 진화한다는 종래의 목적론적 설명을 생명체와 종도 다른 물리현상과 마찬가지로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인과(因果) 과정을 통해 기계적으로 변화할 뿐이라는 혁명적으로 다른 설명을 제시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아무리 정교히 다듬어도 다윈의 인과적 기계론이 도출되지 않는다. 이런 변화는 목적론적 전제를 기계론으로 대체하는 극적인 변화, 즉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과학혁명은 그 이전 이론의 개념과 세계에 대한 해석을 바꾼다. 예를 들어 뉴턴 역학에 있어서의 질량, 시간, 그리고 공간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말하는 시공간과 질량은 다른 물리적 속성이다. E=mc2이라는 공식으로 잘 알려진 대로 상대성이론은 질량과 에너지가 상호 교환된다고 본다. 옛 이론을 교체한 새 과학 이론이 비록 같은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그 의미와 해석은 다르다.


존재 세계에 대한 불교적 이해는 일상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혁명적 변화를 거쳐야 이룰 수 있다. 우리는 만물이 스스로 존재하며 그 스스로를 규정짓는 본성 또는 자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저 산의 큰 바위는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며 바위로서의 속성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불교는 만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지속·소멸한다는 연기(緣起)를 가르치며 어느 사물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 실재(實在)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실재를 가능하게 하는 자성 또한 없어 공(空)하다고 주장한다. 가히 혁명적인 주장들이다.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불교는 상식과는 관점이 전혀 다르다. 우리는 사물을 그것이 생긴 그대로 보고 인식한다고 믿는다. 빨간 장미는 우리가 보고 느끼는 대로 빨갛고 또 모양과 향기도 실제로 그럴 것이라도 생각한다. 모차르트의 선율 또한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우리가 그렇게 느끼고 즐긴다고 쉽게 믿는다. 그러나 불교는 사물과 우리의 감각기관 또 그에 해당하는 의식이 연기해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근경식(根境識)의 삼사화합(三事和合)을 가르친다. 우리의 인식 능력과 별도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장미도 또 음악도 없다. 이것은 우리의 인식에 대한 혁명적으로 다른 관점이다.


나는 현응 스님이 그의 『깨달음과 역사』에서 주장한 ‘혁명적 깨달음’으로서의 돈오에 대체로 동의한다. 흔히 돈오를 한순간 갑자기 깨치는 신비한 경험으로 알고 있지만, 한국은 물론 영어권에서도 한자어인 “돈(頓)”을 이런 시간적 의미보다는 ‘모두,’ ‘한꺼번에,’ ‘포괄적으로’라는 논리적 의미로 이해해가고 있다. 변화에 시간이 필요한 생물학적 존재인 우리가 어느 순간 갑자기 모두 깨닫는다는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깨달음이 삶과 세계를 보는 우리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혁명적으로) 바꾸어 모든 존재를 한꺼번에 새로이 해석하게 하는 가장 포괄적인 논리적 변화를 의미한다면, 우리는 불교의 깨달음을 혁명적 깨달음, 즉 돈오로 이해할 수 있겠다.


선문에서는 ‘깨달음’보다는 ‘깨침’을 가르친다. 이는 붓다의 무아와 연기 그리고 공에 대한 이해와 체득을 가리키는 깨달음은 진정한 득도(得道)가 아니고, 마음에서 불성을 깨쳐야 성불한다는(直指人心 見性成佛) 선문의 주장과 관련된다. 그러나 불성이 비(非)불교적인 바라문교와 힌두교의 아트만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에 우리는 이미 익숙하다. 그래서 나는 불성을 깨쳐야 성불한다는 전통적 견해를 잠시 접어두고, 붓다의 무아, 연기, 공과 같은 기본적인 가르침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내면화가 깨달음이라고 받아들이며 논의를 진행한다.


붓다는 여러 논증을 통해 무아를 가르쳤는데, 지금도 혁명적으로 여겨지는 이 가르침은 당시에 정말 놀라운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고대 인도의 바라문교는 우리를 스스로이게끔 만드는 영원불변 불멸의 자아, 즉 아트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트만이 실제로는 전 우주의 자아라고도 할 수 있을 브라만과 동일하다고까지 보았다. 이런 믿음은 서양인의 불멸의 영혼에 대한 견해와 구원받은 영혼이 신과 합일(合一)하게 된다는 믿음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붓다는 자아가 단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온(五蘊)의 끊임없는 생멸의 과정에 불과하다는 논증으로 무아를 설파했다. 전 세계 주요 종교 가운데 오직 불교만이 가지고 있는 혁명적 통찰이다.


브라만과 아트만 그리고 신과 영혼은 그것들이 존재하기 위해 다른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독립적 존재로서, 서양 철학에서 말하는 실체(實體)다. 이것들은, 비록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무한히 신비로운 속성을 지니고 존재한다. 그리고 전통적 서양 철학은 물질과 정신을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로 여겼다. 그런데 붓다는 만물이 조건에 의해 생멸한다고 가르치며 이것들의 실재를 부정한다. 이는 고대인뿐만 아니라 현대인에게도 충격적으로 놀라운 가르침이다.


불교는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것도 스스로를 스스로이게끔 만들어주는 본질, 즉 자성을 가지고 실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만물은 자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공하다. 이 또한 만물에서 본질을 찾는 다른 종교 및 철학과 전혀 다른 견해다. 불교는 이 세계가 자성 없이 서로를 조건으로 해서 존재하는 현상 또는 환(幻)으로 되어 있다고 보는데, 이것도 우리의 상식적 세계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불교의 기본적 가르침은 모두 우리의 상식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깨달음은 우리가 무아와 연기 그리고 공의 관점을 완전히 체득해 삶과 세계에 접할 때 가능하다. 이 관점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우리의 상식과 혁명적으로 다른 해석을 함축한다. 이런 관점은 논리적으로 모든 사물에 하나도 빠짐없이 적용되기 때문에 삶과 세계에 대한 우리 입장의 가장 포괄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위에서 ‘돈(頓)’을 논리적으로 ‘모두,’ ‘한꺼번에,’ ‘포괄적으로’라는 의미라고 했는데, 이런 의미에서 불교의 깨달음은 언제나 돈오다. 돈오는 과학혁명보다 더 포괄적이어서 자연뿐 아니라 의식 세계를 포함하는 존재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깨달음이다.


불교에서는 점오(漸悟)가 불가능하다. 천동설과 목적론을 정교히 다듬어도 지동설과 기계론이 나올 수 없듯이, 실체론과 실재론을 아무리 갈고닦아도 무아와 연기 그리고 공이 나올 수 없다. 깨달음은 삶과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와 가정 그리고 관점을 전적으로 바꾸어야만 가능하다. 이것은 혁명적 변화이지 점진적 향상이 아니다. 과학의 발전이 그렇고, 불교의 깨달음도 그렇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과 무아』, 『불교는 생명과학과 어떻게 만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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