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과 메타버스 | 인터넷 가상현실 속 불교

인공지능과 메타버스


보일 스님 

해인사승가대학 학장 대행


메타버스 가상박물관 '힐링동산'의 아바타 체험 모습 예시 사진_국립중앙박물관




디지털 휴먼에서 메타휴먼으로

혹시 이런 이름을 들어본 적 있나요? ‘네온’, ‘로지’, ‘루시’, ‘미아’, ‘수아’, ‘한유아’, ‘빈센트’ 등. 만약 익숙한 이름이라면 당신은 이미 메타버스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지도 모르겠다. 이 이름들의 공통점은 바로 디지털 휴먼이라는 점이다. 최근 국내의 한 금융 회사는 자사의 새 광고 모델로 ‘로지’라는 이름의 디지털 휴먼을 선보였다. 마치 실재 인간처럼 인스타그램에 나이는 22세, 키는 171cm, 여행과 운동을 좋아한다고 소개한다. 세상에 나온 지 1년 만에 팔로어는 6만 명을 훌쩍 넘겼다. ‘로지’는 개성 넘치는 외모와 아이돌처럼 능숙한 춤 솜씨를 자랑한다. 사람들은 이전에 어떤 미디어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얼굴의 등장에 신선해했고, 실재하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다시 놀라워했다. 디지털 휴먼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디지털 공간에서의 가상 인간을 말한다. 이와 같은 디지털 휴먼 기술은 극사실적인 디지털 표현 기술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실존하는 인물과 분간이 힘들 정도다. 여기에 인공지능 기술이 결합해서 세밀한 부분까지 정교하게 작업하면 그다음은 오히려 실재 인간보다 더 사실적으로 바뀌게 된다. 인공지능 딥러닝 얼굴・음성 합성 기술을 통해 인간을 디지털 공간에 복제하는 방식이다. 최근 기술 수준은 사진 1장과 30초 정도의 목소리 데이터만 있으면 디지털 공간에 새로운 가상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메타 환생

이런 디지털 휴먼이 단순히 인터넷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메타버스 공간에서 활동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역사 속 과거의 인물일지라도 메타버스에 불러들여 대화하고 게임도 할 수 있게 된다. 이미 그 인물의 과거 삶의 기록은 디지털로 저장되어 있는 상태다. 그 기억 데이터들을 복원해서 이 디지털 휴먼 기술과 결합시킨다면 메타버스에서 죽은 사람을 환생시키는 것과 같다. 그 사람만의 고유한 표정이나 몸짓, 성격마저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 어쩌면 메타버스 공간에서는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적어도 메타버스에서는 가능하다. 살짝 섬뜩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는 위로와 행복이 될 수 있다. 현재 살아 있는 자의 아바타와 대화하면서 게임하고 즐기면서 말이다. 이제 과학기술은 삶과 죽음의 경계 또는 인간과 디지털의 경계마저도 흐리고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새로운 ‘시뮬라크르’, 메타버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메타버스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메타버스는 또 다른 형태의 ‘시뮬라크르(Simulacre)’다. 메타버스는 인간으로 하여금 매 순간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환경을 감각기관을 통해 마치 현실 세계처럼 느낄 수 있도록 구현한 복제물이다. 현실 세계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디지털 기술을 통해 몰입감을 높이고 현실 세계에서 불가능한 일을 경험하게 하거나 감각적 즐거움을 극대화해준다. 하지만 그래봤자 복제된 허구의 공간에 불과하다는 반문도 가능하다. 과연 그럴까? 들뢰즈(Gilles Deleuze)에 따르면 시뮬라크르는 단순한 현실 세계의 복제물이 아니다. 들뢰즈는 플라톤과는 달리 현실 세계와 시뮬라크르 간에 생겨나는 차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시뮬라크르가 얼마나 현실 세계와 비슷한지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들뢰즈에게 모방과 재현 자체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원본이 이해 기준이 되거나 원본에 종속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독자적으로 현실 세계와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메타버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그리고 이용자가 내리는 매 순간의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주목한다.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추억이라고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면 그 공간(space)은 이미 자율적인 지위를 부여받은 장소(place)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메타버스에서 게임을 하면서 대화를 하거나, 선물을 주고받기도 하면서 상호작용한다. 그 과정은 이야기가 되고 각각의 참여자는 자신의 주관적 감정들을 쌓아가고 그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되풀이된다. 결국에는 하나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메타버스는 단순한 복제물이 아니라 고유한 독립성마저 가지게 된다. 메타버스가 단순히 현실 세계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으로 메타버스는 원본으로 간주되는 현실 세계의 오라 또는 신비주의를 깨뜨리고 그 실재성에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초월의 ‘meta’에서 자비의 ‘metta’로

그럼 어떻게 메타버스 시대를 살아갈 것인가? 현실은 현실대로, 메타버스는 메타버스대로 의미를 지닌다. 경계가 없다. 어차피 인간의 현실 세계의 경험이라는 것도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에 따라 기억을 재구성하면서 구현한다. 『능가경』에서도 설한다. “물과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놀라는 사람처럼, 등불과 달빛 속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타인으로 오해하는 것처럼” 모든 존재와 현상은 마음이 투사된 것이고 오직 분별일 뿐이다. 메타버스가 구현하는 매혹적인 색과 형상, 소리, 감촉들도 다름 아닌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메타버스가 구현하는 다양한 법계에 대해 집착할 것도 없고 외면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다만 현실 세계든 메타버스든 그 법계가 펼쳐질 때마다 허망한 분별을 일삼는 것을 경계할 일이다. 매 순간 바뀌는 바로 그 대상의 형상에 넋을 잃고 헐떡이면서 쫓아갈 것이 아니라, 잠시라도 그 마음을 자신의 내면으로 돌이키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원본이라 믿는 현실 세계든 가상이라고 믿는 가상 세계든 어차피 마음의 분별 작용이다. 원본을 복제한 세상이든, 그것이 원본보다 수승하든 열등하든,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에 어떤 가치를 담아낼 것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예를 들자면, 메타버스에서 ‘초월’의 ‘meta’가 아니라, ‘자비’라는 의미의 ‘metta’가 온 세상을 뒤덮는 자비 세상인 ‘metta-verse’를 염원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왕이면 그 마음을 내는 ‘나’조차도 또 다른 메타버스 속에 있는 환영임을 자각하면서 말이다.



보일 스님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철학과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해인사승가대학 학장 대행으로 있다. 저서로 『AI 부디즘』이 있고, 「인공지능 챗봇에 대한 선禪문답 알고리즘의 데이터 연구」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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