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불교를 보다 | 사유와 성찰

사유와 성찰


다시 불교를 보다 

서양 철학에서 보는 불교 이야기


이수정 

창원대학교 철학과 교수・대학원장



‘다시 불교를 본다’는 말은 조심스럽다. ‘다시’ 라는 말이 불교에 대해 유효할까? 이런 우려 내지 시비가 있을 수 있다. 불교의 역사는 이미 2,500년이 넘는다.그 전파 범위도 인도, 중국, 한국, 일본, 동남아를 넘어 이젠 미국, 유럽 등 전 세계로 확장되어 있다. 길고도 넓다. 외적인 양상뿐만이 아니다. 그 이론은 또 어떤가?아난다, 수보리… 등 부처 당시의 10대 제자는 물론 용수, 무착, 세친, 달마, 혜능, 원효, 지눌, 구카이, 사이초… 등등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론가 실천가도 부지기수다. 아직도 남아 있는 뭔가가 있을까? 그런데도 ‘다시’?

 그렇다. 다시다. 이 ‘다시’는 불교에 대해서도 유효하고 지금은 더욱 유효하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유효해야 한다. 왜?
 그 대답의 한 자락을 서양 현대 철학의 최고봉 중 하나인 마르틴 하이데거가 알려준다. 그리고 그 뿌리의 한 갈래인 프리드리히 니체가 알려준다. 하이데거는 알다시피 ‘존재’라는 단어 하나를 100권의 전집으로 풀어낸 존재론, 즉 형이상학의 거장이었다. 워낙 유명해 이제 웬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그의 가장 큰 공로는 서양 철학의 초창기 아낙시만드로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등 거장들을 ‘숨 가쁘게 했던’, 그리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헤겔등을 거치며 ‘덧칠된’, 그렇게 해서 ‘망각’의 상태에 빠져든 저 엄청난 철학의 대주제 ‘존재’를 다시 무대에 올려 반짝이게 했다는 것이다. 그 체온과 숨결을 되살려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다시’였다. 그것을 그는 ‘되돌아-가기(Schritt-zurueck)’라고 표현했다. 원천, 원점, 때가 묻고 먼지가 쌓이기 전의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끊임없이 자기를 되묻도록 우리 인간들에게 ‘말을 걸고’, ‘호소한다’. 부처의 주제들도 바로 그런 것이다. 아니, 어떤 점에서는 ‘존재’보다 더욱 그렇다. 우리 자신의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다시’ 불교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니체는 우리 인간의 ‘삶’에 뜨거운 시선을 보내면서 그것에 대해 ‘영원회귀(ewige Wiederkehr)’와 ‘다시 한번!(noch einmal)’을 외친다. 우리 인간의 삶 자체가 영원한 회귀의 구조를 갖고 있기에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그 원점에서 다시(wieder/nochmal)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운명’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그 원점은 도대체 어디일까? 그것도 이미 유명해 역시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게 바로 ‘고(苦, dukkha)’다. 고의 인식이다. 우리는 이 원점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거기서 저 부처가 개척한 길을 스스로의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바로 고집멸도,이른바 4성제다. 누가 뭐래도 불교의 근간은 3법인, 4성제, 8정도, 12연기다. 진정한 불교는 방대한 8만대장경 속에 있지 않다. 심산유곡이나 거대 사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저 8만대장경의 모든 단어들이 ‘도(度, 건너감)’라는 글자 하나에 압축되어 있다.그게 불교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관자재보살이 심오한 반야바라밀다(지혜 수행)를 행할 때 오온이 다 공함을 환히 비추어보고 모든 고액을 건너갔(조다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고 하는 바로 그 ‘건너감’이다. 불교란 바로 그런 길이다. 고에서 도로! 혹은 멸로! 괴로움에서 건너감으로! 이 한마디가 불교의 거의 전부다. 구경열반도 결국 같은 말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gatte gatte paragatte: 가세 가세 [저편으로] 건너가세)’도 결국 같은 말이다. 내려놓기, 비우기, 버리기, 떠나기… 등도 같은 맥락이다. 이 한마디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헛된 것에 대한 갈애/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8만대장경을 다 외운다 하더라도 말짱 도루묵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되돌아가야 할 이런 원점은 실제 불교의 원점이기도 한 저 ‘초전법륜’에 이미 다 드러나 있다. (나는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풀어냈다: 『부처는 이렇게 말했다』) 그 핵심이 저 너무나도 유명한 『반야심경』에 잘 압축되어 있다.
 우리 모든 인간에게 너무나도 생생한 현실인 ‘고’에서 시작함. 그리고 그 고에서 벗어남. 불교는 이렇듯 단순명쾌한 구조를 갖는다. 불교의 모든 언어들은 이 ‘고’와 ‘멸’ 사이에, 즉 ‘도’라는 한 글자 위에 가로놓여 있다. 그것은 부처 본인의 말로 괴로움의 바다를 (혹은 강을) 건너는 ‘뗏목’과도 같다. 그래서 불교는 하나는 항해술이다. 마음의 항해술이다.
 상대적으로 좀 덜 유명하지만 서양 철학의 역사에도 이런 철학이 없지 않았다. 고대 후반의 저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회의학파의 철학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이 추구했던 저 아파테이아, 아타락시아, 아포니아가 실은 저 부처가 말한 열반적정과 같은 부류였다. 무감정-평정심-무고통이라고 이 말들을 옮겨 놓으면 그게 저절로 드러난다.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제논이나 에피쿠로스나 퓌론이나 그들도 다 저 부처와 한통속이었던 것이다. ‘동도서기’니 하는 말은 단언하건대 엉터리다. 서양이라고 도가 없겠는가. 동양이라고 기가 없겠는가. 동양에도 서양에도 다 인간이 살고 있고 그들은 다 필연적으로 고의 손바닥에서 허우적 댄다. 힘들고 괴롭다. 생생한 현실이다. 각자가 감당해야 할 ‘나’의 현실이다. 그래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게 바로 ‘다시’가 필요한 이유다.
 오늘날 불교는 세월과 세상의 풍화를 겪으면서 다른 모든 철학들과 유사하게 ‘지식화’, ‘박제화’, ‘형해화’의 위태로운 길을 가고 있다. 우리는 발걸음을 되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로? 다시 원점으로. 부처의 체온과 숨결이 느껴지는 저 녹야원으로. 기원정사로. 죽림정사로. 아니, 저 꼰단냐의 옆자리로. 보리수 아래 앉아 있는 부처의 앞으로. 그리고 고의 인식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멸을 향해. 도를 이루기 위해. 다시, 또다시. 끊임없이 다시.
 이미 입적해 입을 닫은 부처를 대신해 그의 구호를 대신 읊어본다. ‘갓떼 갓떼 빠라갓떼 빠라상갓떼 보디 스와하(gatte gatte paragatte parasṃgatte bodhi svaha: 가세 가세 건너가세 모두 건너가서 무한한 깨달음을 이루세).



이수정 일본 도쿄대(東京大)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 철학전문과정에서 석사 및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도쿄대,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프라이브루크대 연구원을 지냈고, 한국하이데거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월간 『순수문학』으로 등단했다. 현재 창원대 철학과 교수·대학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향기의 인연』과 『하이데거-그의 생애와 사상』(공저), 『부처는 이렇게 말했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 도덕경의 새 번역, 새 해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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