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가와 승가의 구분이 없는 금강산 건봉사 | 공간이 마음을 움직인다

부처님 아래에서는 승과 속이 하나다
금강산 건봉사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공학 박사


건봉사는 건봉산 건봉사가 아니라 금강산 건봉사다. 건봉산은 금강산 줄기 끝이니 금강산 건봉사로 불리는 게 어색하지 않다.

건봉산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물이 건봉사를 좌우로 가른다. 물길을 오른쪽에 끼고 오르면 불이문(不二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이 나온다. 조선 4대 사찰 중 하나일 정도로 거찰이었던 건봉사이지만 한국전쟁 때 모든 건물이 파괴되어 정문이라 볼 수 있는 불이문만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이 문은 1920년에 건립한 네 개의 석주 위에 나무 기둥을 세워 지은 독특한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현판은 근대 서예의 거목이면서 한국 상업 사진관의 효시인 천연당사진관의 주인인 김규진이 썼다.

개울을 중심으로 왼쪽은 극락전 지역이 오른쪽은 대웅전 지역이 대칭을 이룬다. 두 곳은 보물 제1336호인 능파교(凌波橋)로 연결된다. 대웅전에서 다리를 건너면 극락전이고 극락전에서 건너면 대웅전이다. 지금의 다리는 2005년에 중수한 것이어서 과연 문화재일까 의심할 수 있겠으나 원래 다리를 구성했던 석재들을 그대로 사용했다.

불이문 옆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에는 이 다리가 18세기 초에 처음 축조되었다고 적혀 있다. 다리의 중앙 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아치)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했다. 이런 다리를 홍교(虹橋)라고 부르는데, 홍교는 다리 밑이 무지개처럼 반원형이 되도록 쌓은 다리를 가리킨다. 보물 제304호 보성 벌교의 홍교, 선암사의 승선교(昇仙橋, 보물 제400호), 경상남도 창녕군의 영산만년교(靈山萬年橋, 보물 제564호)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만 다리가 보물인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건봉사 가는 길에는 능파교 말고도 홍교가 두 개 더 있다. 첫째 것은 건봉사 5리 앞에 있는 육송정 홍교이고, 둘째 것은 건봉사 어귀에 있다. 솔밭 안에 있는 작은 다리인데 마치 인간 세계와 부처의 세계를 나누는 경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마지막 다리가 절 안에 있는 능파교, 세속의 때가 남아 있다면 다 벗기고 들어오라는 것처럼 들린다.

능파교 못지않게 아름다운 다리는 불이문 옆에 있는 연화교다. 연화교를 건너면 불이문을 거치지 않고 대웅전 지역으로 갈 수 있다. 연화교 한가운데에서 건봉사를 올려다보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극락전 지역은 불에 타 모두 사라졌고 불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은 황량하지만 이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오른쪽으로 내려오는 개울을 거슬러 불이문에서 저 위쪽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은 매우 경건하다. 불이문에서 적멸보궁까지는 꽤 걸어야 한다. 길은 탁 트인 듯하면서도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길을 이루니 부처님을 알현하는데 오르막길의 노동은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건봉사에는 부도들이 많다. 건봉사에 부도비가 많은 것은 고승뿐만 아니라 신도들의 부도비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신라 경덕왕 때 선남선녀 10여 명이 진주 미타사에서 만일염불계를 맺고 정진하고 있었다. 주인을 따라온 욱연이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그녀는 일을 시키면 반나절 만에 일을 마치고 절에 와 염불했다. 그녀의 지성이 통했던지 하늘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절간 천장을 뚫고 날아갔다. 그녀가 날아가다 해탈한 몸체가 떨어진 곳이 금강산 건봉사다. 이것을 계기로 해서 건봉사에서는 승과 속의 구분이 사라졌다.

건봉사는 세조 10년(1464) 세조가 행차해 자신의 원당(願堂)으로 삼은 뒤 어실각(御室閣)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쓴 동참문을 하사해 이때부터 조선 왕실의 원당이 되었다. 조선 후기 전성기 때는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군의 낙산사, 금강산의 유점사와 장안사들을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대찰(大刹)이 되었다. 조선조 고종 때 산불로 전소되었는데 이를 다음 해부터 중건해 강점기 시대에도 해마다 쌀 6,000〜7,000섬을 거두어들였다고 알려졌다. 한국전쟁 전에도 규모가 776칸일 정도로 대찰로 명성을 이어갔다. 지금은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다.

건봉사에서 만일염불회의 법통을 이어나갔고 용맹정진한 스님들이 서천으로 승천했으며 스님들을 후원했던 신도들도 차례로 극락왕생했다고 한다. 건봉사에 신도들의 부도가 생기게 된 연유이며 만일염불회는 건봉사만의 독특한 전통으로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1912년 한암 스님께서 무차선회를 여셨으니 사부대중들이 경계가 없이 법거량을 펼쳤을 장관이 그려진다. 그러니 건봉사는 속가와 승가의 구분이 없고 대웅전과 극락전의 구분도 없다. 그저 개울이 경계이고 다리 하나를 건너면 그만이다. 오직 있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이종호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대학에서 공학 박사 학위와 과학 국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등에서 연구했다.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유네스코 선정 한국의 세계문화유산』(전 2권) 등 100여 권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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