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불교 경전 길라잡이|『금강경』 (2)
『금강경』은
보리심을 완성하기 위한 경전
원빈 스님
송덕사 주지, 행복문화연구소 소장
『금강경』의 주 청중은 누구인가?
『금강경』은 수보리 존자가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경전에 수보리 존자와 부처님 간의 질의응답이 오고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께서 염두에 두시는 이들은 수보리 존자의 뒤편에 자리한 사부대중(四部大衆)입니다. 그러므로 실상은 수보리 존자가 대중들이 품고 있는 의문을 대신해 질문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이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소의경전이듯, 후오백세(後五百歲)인 기원전후에는 보살승들의 소의경전이었습니다. 소의경전은 당연히 초심자부터 숙련자까지 모든 이들에게 의지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금강경』은 모든 보살승을 위한 가르침이지만 그중에서도 주 대상이 되는 청중은 다름 아니라 ‘처음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입니다. 이 근거가 되는 내용을 『금강경』 본문 중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남자 선여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금강경』에서 수보리 존자의 이 질문은 전체를 꿰뚫는 핵심입니다. 이 질문은 보살승으로 수행하게 되면 누구나 겪게 되는 보편적 어려움을 주(住)와 단(斷)의 문제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중 서두에는 경전이 청중으로 삼는 주 대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묘사된 특징을 정리해보면 첫째는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원하는 이들이고, 둘째는 선남자 선여인입니다.
『금강경』이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소의경전이듯, 후오백세(後五百歲)인 기원전후에는 보살승들의 소의경전이었습니다. 소의경전은 당연히 초심자부터 숙련자까지 모든 이들에게 의지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금강경』은 모든 보살승을 위한 가르침이지만 그중에서도 주 대상이 되는 청중은 다름 아니라 ‘처음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입니다. 이 근거가 되는 내용을 『금강경』 본문 중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남자 선여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금강경』에서 수보리 존자의 이 질문은 전체를 꿰뚫는 핵심입니다. 이 질문은 보살승으로 수행하게 되면 누구나 겪게 되는 보편적 어려움을 주(住)와 단(斷)의 문제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중 서두에는 경전이 청중으로 삼는 주 대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묘사된 특징을 정리해보면 첫째는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원하는 이들이고, 둘째는 선남자 선여인입니다.
보살승의 보편적 문제
부처님께서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성취를 위해서는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사여의족(四如意足)’이라고 말하는데, 욕(欲)·정진(精進)·심(心)·사유(思惟) 여의족입니다. 욕이란 성취하기를 원하는 마음이고, 정진이란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며, 심이란 성취를 위해 결심하는 것이고, 사유란 이 모든 과정을 돕는 관찰과 이해를 의미합니다.
기존의 삶에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는 선남자 선여인들은 새로운 삶의 목표인 성불을 원하는 욕여의족을 이미 갖추고 있습니다. 여기에 성불을 위해 정진하다 보면 누구나 기존의 삶의 흐름과 충돌이 일어나 혼란을 겪게 됩니다. 용맹한 결심과 법의 사유로써 확신을 지니고 이 장애를 뛰어넘는 소수의 보살도 있지만, 다수의 보살은 장애를 넘지 못하고 성불의 길을 포기하게 됩니다. 수보리 존자는 이에 대해서 주와 단의 문제로 질문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보리심에 더욱 강렬하게 머무를[주:住]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보리심을 장애하는 의심들을 끊을[단:斷] 수 있을까?’
인도 『금강경』은 주와 단에 수(修)의 문제를 더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선남자나 선여인은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조복받아야 합니까?”
감산 대사(憨山大師, 1546~1623)는 그의 주석서를 통해 『금강경』은 이 주수단의 문제를 오직 한 가지 키워드로 해결하고 있다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는 『금강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금강심(金剛心)’만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금강심’이란 다름 아닌 보리심이기에, 보살들이 수행 시 발생하는 보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란 보리심에 더욱 강렬히 의지하고 보리심을 갈고닦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모든 의심은 자연스럽게 끊어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매우 단순명료한 이 답변은 명쾌한 진실이지만 금강심의 실체가 잡히지 않는 이들에게는 어려울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기존의 삶에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는 선남자 선여인들은 새로운 삶의 목표인 성불을 원하는 욕여의족을 이미 갖추고 있습니다. 여기에 성불을 위해 정진하다 보면 누구나 기존의 삶의 흐름과 충돌이 일어나 혼란을 겪게 됩니다. 용맹한 결심과 법의 사유로써 확신을 지니고 이 장애를 뛰어넘는 소수의 보살도 있지만, 다수의 보살은 장애를 넘지 못하고 성불의 길을 포기하게 됩니다. 수보리 존자는 이에 대해서 주와 단의 문제로 질문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보리심에 더욱 강렬하게 머무를[주:住]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보리심을 장애하는 의심들을 끊을[단:斷] 수 있을까?’
인도 『금강경』은 주와 단에 수(修)의 문제를 더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선남자나 선여인은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조복받아야 합니까?”
감산 대사(憨山大師, 1546~1623)는 그의 주석서를 통해 『금강경』은 이 주수단의 문제를 오직 한 가지 키워드로 해결하고 있다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는 『금강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금강심(金剛心)’만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금강심’이란 다름 아닌 보리심이기에, 보살들이 수행 시 발생하는 보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란 보리심에 더욱 강렬히 의지하고 보리심을 갈고닦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모든 의심은 자연스럽게 끊어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매우 단순명료한 이 답변은 명쾌한 진실이지만 금강심의 실체가 잡히지 않는 이들에게는 어려울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금강심이란 무엇인가?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 스님은 금강심을 광대심(廣大心), 제일심(第一心), 상심(常心), 부전도심(不顚倒心)의 네 가지 마음으로 구분합니다. 이 네 가지 마음이 『금강경』에서 설명하는 보리심이니 『금강경』 본문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알에서 태어난 것이나, 태에서 태어난 것이나, 습기에서 태어난 것이나, 변화하여 태어난 것이나, 형상이 있는 것이나, 형상이 없는 것이나, 생각이 있는 것이나, 생각이 없는 것이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온갖 중생들을(…)”
여기까지가 광대심입니다. 중생은 자아의식을 원동력으로 살아가기에 생의 흐름인 윤회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이 살아가는 세상은 오직 자아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주의가 강하면 강할수록 마음은 더 협소해집니다. 중생은 본래 부처님과 똑같은 광대심을 지녔지만, 이 마음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광대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마음에 ‘나’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을 담는 연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아귀의 삶에서 중생을 위해 살아가는 보살의 삶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온갖 중생들을 내가 모두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리라.”
본문 중 이 부분이 제일심입니다. 『입보살행론』에서는 성불의 길을 걷는 보살의 삶을 모든 것을 주는 삶으로 묘사합니다. 아귀의 삶은 움켜쥐는 삶이고, 보살의 삶은 주는 삶입니다. 제일심은 광대한 일체중생에게 줄 수 있는 것 중 제일 최고의 것을 주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중생을 완전한 열반으로 이끄는 것으로, 이 이상 더 큰 행복을 줄 방법은 없습니다.
“이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한 열반을 얻은 중생이 아무도 없다.”
『금강경』에서는 이 마음을 상심이라고 명칭합니다. ‘중생을 구했는데, 구한 바가 없다’라는 이 역설은 『금강경』에서 자주 쓰이는 즉비(卽非)의 논리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글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상(常)’입니다. 이 ‘항상하다’라는 한자가 의미하는 바는 중생은 항상 부처의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상심은 이처럼 중생은 본래 부처에서 부처님이 되는 환영과도 같은 수행을 하는 것이기에,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아닌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보살에게 자아가 있다는 관념, 개아가 있다는 관념, 중생이 있다는 관념,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금강경』의 이 부분은 부전도심을 보여줍니다. 감산 대사는 금강심은 곧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렇기에 금강심에는 전도된 중생심이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야 하는데, 이 중생심의 정체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입니다. 이 아·인·중·수자상에 대한 해석은 정말 다양하지만, 그중 가장 담백한 해석은 아·인·중·수자상을 차례로 탐욕과 분노, 우치와 갈애로 배대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부전도심은 탐·진·치·애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불심(佛心)입니다.
『금강경』은 자비와 지혜의 합일된 마음인 보리심을 완성하기 위한 경전입니다. 그렇기에 금강심 역시 자비와 지혜의 양 날개를 모두 갖추고 있는 마음입니다. 광대심과 제일심은 자비의 측면이 강하지만 상심과 부전도심은 반야 지혜의 측면이 강합니다. 감산 대사의 의견처럼 『금강경』은 자비와 지혜가 금강사심(金剛四心)으로 반복되는 구조입니다.
여기까지가 광대심입니다. 중생은 자아의식을 원동력으로 살아가기에 생의 흐름인 윤회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이 살아가는 세상은 오직 자아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주의가 강하면 강할수록 마음은 더 협소해집니다. 중생은 본래 부처님과 똑같은 광대심을 지녔지만, 이 마음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광대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마음에 ‘나’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을 담는 연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아귀의 삶에서 중생을 위해 살아가는 보살의 삶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온갖 중생들을 내가 모두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리라.”
본문 중 이 부분이 제일심입니다. 『입보살행론』에서는 성불의 길을 걷는 보살의 삶을 모든 것을 주는 삶으로 묘사합니다. 아귀의 삶은 움켜쥐는 삶이고, 보살의 삶은 주는 삶입니다. 제일심은 광대한 일체중생에게 줄 수 있는 것 중 제일 최고의 것을 주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중생을 완전한 열반으로 이끄는 것으로, 이 이상 더 큰 행복을 줄 방법은 없습니다.
“이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한 열반을 얻은 중생이 아무도 없다.”
『금강경』에서는 이 마음을 상심이라고 명칭합니다. ‘중생을 구했는데, 구한 바가 없다’라는 이 역설은 『금강경』에서 자주 쓰이는 즉비(卽非)의 논리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글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상(常)’입니다. 이 ‘항상하다’라는 한자가 의미하는 바는 중생은 항상 부처의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상심은 이처럼 중생은 본래 부처에서 부처님이 되는 환영과도 같은 수행을 하는 것이기에,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아닌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보살에게 자아가 있다는 관념, 개아가 있다는 관념, 중생이 있다는 관념,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금강경』의 이 부분은 부전도심을 보여줍니다. 감산 대사는 금강심은 곧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렇기에 금강심에는 전도된 중생심이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야 하는데, 이 중생심의 정체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입니다. 이 아·인·중·수자상에 대한 해석은 정말 다양하지만, 그중 가장 담백한 해석은 아·인·중·수자상을 차례로 탐욕과 분노, 우치와 갈애로 배대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부전도심은 탐·진·치·애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불심(佛心)입니다.
『금강경』은 자비와 지혜의 합일된 마음인 보리심을 완성하기 위한 경전입니다. 그렇기에 금강심 역시 자비와 지혜의 양 날개를 모두 갖추고 있는 마음입니다. 광대심과 제일심은 자비의 측면이 강하지만 상심과 부전도심은 반야 지혜의 측면이 강합니다. 감산 대사의 의견처럼 『금강경』은 자비와 지혜가 금강사심(金剛四心)으로 반복되는 구조입니다.
금강심 수행법 -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상근기 보살의 경우 주수단의 문제를 금강심 하나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근기, 하근기의 경우 좀 더 자세한 설명과 수행 방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중근기 중생을 위해서는 무주상보시, 하근기 중생을 위해서는 수지독송(受持讀誦)의 반복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금강경』 전체를 꿰뚫는 대질문은 주수단의 문제였습니다.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이후의 내용은 금강심을 수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인 무주상보시에 대한 내용이 반복됩니다. 주수단 각각에 대한 해답을 살펴보자면 ‘무주에 머무르고[주:住], 무상으로 의심을 끊으며[단:斷], 보시를 닦는 것[수:修]’이니 이 내용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에서는 무주에 머무르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힌트를 줍니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은 어떤 대상에도 집착 없이 보시해야 한다. 말하자면 형색에 집착 없이 보시해야 하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도 집착 없이 보시해야 한다.”
조계종단 표준 해석에서는 ‘집착 없이 보시해야 한다’라고 번역했지만, 그 원문은 부주(不住)로 ‘머무르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금강경』에서 무주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이 ‘머무를 주(住)’는 육체가 공간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막연하게 마음이 머무르는 것을 뭉뚱그려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주의력이 대상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주의력이 팔정도의 정념(正念) 중 념(念)에 해당합니다.
인간은 주의력이 닿는 대상만을 경험합니다. 그렇기에 경험의 열쇠는 바로 주의력, ‘사띠(sati)’입니다. 중생심의 불편한 경험을 불심의 편안한 경험으로 바꾸려면 이 사띠를 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력이 닿는 대상만 경험하지만, 이 주의력이 대상에 사로잡히면 집착이 생겨납니다. 그렇기에 대상을 경험하되 사로잡히지 않는 무주에 주해야 할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대상에 대한 관념에 집착 없이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관념에 집착 없이 보시한다’ 라는 것은 ‘대상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보시한다’ 라는 것입니다.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깨어 있음이 없는 방일한 상태이고, 이 상태에서 하는 모든 행위는 그저 망상일 뿐입니다. 부처님을 각자(覺者)로 표현할 때 각은 깨달을 각(覺)이기도 하지만 깨어날 각(覺)이기도 합니다. 망상의 꿈에서 깨어난 자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그리고 이 깨어남은 사띠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행위가 복덕이 수승한 이유는, 이것이 깨어난 자가 되는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무주의 상태로 보시한다’라는 표현을 할 때 보시에 대해서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수단의 문제에 대한 해답 중 하나가 바로 ‘보시’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금강경』을 읽는 불자들은 이 보시를 재보시에 한정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규봉종밀 스님은 주석을 통해 이 보시가 육바라밀 전체를 포섭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본래 보시란 재보시(財布施), 무외보시(無畏布施), 법보시(法布施)로 구분되는데 육바라밀 중 보시바라밀은 재보시에 해당됩니다. 다음으로 지계바라밀과 인욕바라밀은 이를 닦는 것 만으로도 주변의 존재들을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무외보시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으로정진바라밀과 선정바라밀 그리고 반야바라밀의 경우에는 법보시에 해당하는데,규봉종밀 스님이 이를 설명하는 방식이 재미있습니다.
“정진과 선정 그리고 반야바라밀의 수행이 없다면 보시할 법이 어디 있는가?”
‘집착 없이 보시한다’라는 것은 결국 ‘집착 없이 육바라밀을 행한다’는 뜻입니다.『금강경』에서 제일심을 반복해서 언급할 때 재보시와 무외보시 그리고 법보시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는 보시와 육바라밀의 상호 포섭과 연결성이 있습니다.개인적으로는 무주상보시의 보시를 세 가지 보시와 연결된 육바라밀보다 더넓은 개념인 만행(萬行)으로 해석하기를 선호합니다. 즉 보살은 삶의 모든 만행을 무주상의 태도로 연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상태로 반야를 전제로 한만행을 이어나갈 때 보살의 마음은 금강심에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주+무상+보시’ 중 무상의 가르침은 『금강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 중 하나인 반야바라밀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렇기에 본문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데, 이 무상을 이해하기 위한 즉비시명(卽非是名)의 공식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금강경』의 무상의 공식인 즉비시명(卽非是名)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금강경』 전체를 꿰뚫는 대질문은 주수단의 문제였습니다.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이후의 내용은 금강심을 수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인 무주상보시에 대한 내용이 반복됩니다. 주수단 각각에 대한 해답을 살펴보자면 ‘무주에 머무르고[주:住], 무상으로 의심을 끊으며[단:斷], 보시를 닦는 것[수:修]’이니 이 내용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에서는 무주에 머무르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힌트를 줍니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은 어떤 대상에도 집착 없이 보시해야 한다. 말하자면 형색에 집착 없이 보시해야 하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도 집착 없이 보시해야 한다.”
조계종단 표준 해석에서는 ‘집착 없이 보시해야 한다’라고 번역했지만, 그 원문은 부주(不住)로 ‘머무르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금강경』에서 무주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이 ‘머무를 주(住)’는 육체가 공간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막연하게 마음이 머무르는 것을 뭉뚱그려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주의력이 대상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주의력이 팔정도의 정념(正念) 중 념(念)에 해당합니다.
인간은 주의력이 닿는 대상만을 경험합니다. 그렇기에 경험의 열쇠는 바로 주의력, ‘사띠(sati)’입니다. 중생심의 불편한 경험을 불심의 편안한 경험으로 바꾸려면 이 사띠를 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력이 닿는 대상만 경험하지만, 이 주의력이 대상에 사로잡히면 집착이 생겨납니다. 그렇기에 대상을 경험하되 사로잡히지 않는 무주에 주해야 할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대상에 대한 관념에 집착 없이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관념에 집착 없이 보시한다’ 라는 것은 ‘대상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보시한다’ 라는 것입니다.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깨어 있음이 없는 방일한 상태이고, 이 상태에서 하는 모든 행위는 그저 망상일 뿐입니다. 부처님을 각자(覺者)로 표현할 때 각은 깨달을 각(覺)이기도 하지만 깨어날 각(覺)이기도 합니다. 망상의 꿈에서 깨어난 자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그리고 이 깨어남은 사띠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행위가 복덕이 수승한 이유는, 이것이 깨어난 자가 되는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무주의 상태로 보시한다’라는 표현을 할 때 보시에 대해서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수단의 문제에 대한 해답 중 하나가 바로 ‘보시’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금강경』을 읽는 불자들은 이 보시를 재보시에 한정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규봉종밀 스님은 주석을 통해 이 보시가 육바라밀 전체를 포섭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본래 보시란 재보시(財布施), 무외보시(無畏布施), 법보시(法布施)로 구분되는데 육바라밀 중 보시바라밀은 재보시에 해당됩니다. 다음으로 지계바라밀과 인욕바라밀은 이를 닦는 것 만으로도 주변의 존재들을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무외보시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으로정진바라밀과 선정바라밀 그리고 반야바라밀의 경우에는 법보시에 해당하는데,규봉종밀 스님이 이를 설명하는 방식이 재미있습니다.
“정진과 선정 그리고 반야바라밀의 수행이 없다면 보시할 법이 어디 있는가?”
‘집착 없이 보시한다’라는 것은 결국 ‘집착 없이 육바라밀을 행한다’는 뜻입니다.『금강경』에서 제일심을 반복해서 언급할 때 재보시와 무외보시 그리고 법보시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는 보시와 육바라밀의 상호 포섭과 연결성이 있습니다.개인적으로는 무주상보시의 보시를 세 가지 보시와 연결된 육바라밀보다 더넓은 개념인 만행(萬行)으로 해석하기를 선호합니다. 즉 보살은 삶의 모든 만행을 무주상의 태도로 연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상태로 반야를 전제로 한만행을 이어나갈 때 보살의 마음은 금강심에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주+무상+보시’ 중 무상의 가르침은 『금강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 중 하나인 반야바라밀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렇기에 본문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데, 이 무상을 이해하기 위한 즉비시명(卽非是名)의 공식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금강경』의 무상의 공식인 즉비시명(卽非是名)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원빈 스님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행복문화연구소(http://cafe.daum.net/everyday1bean) 소장으로 있으면서 경남 산청에 있는 송덕사의 주지를 맡고 있다. 『BBS불교방송』 라디오와 TV에서 <행복한 두시>와 <원빈 스님의 최고의 행복학, 불교>를 진행했고, 지금은 『BTN불교TV』 <원빈 스님의 금강경에 물들다>를 진행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같은 하루 다른 행복』, 『명상선물』, 『원빈 스님의 금강경에 물들다』, 『굿바이, 분노』 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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