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와 유식 | 유식이란 무엇인가

유식이란 무엇인가 1


무아(無我)와 유식(唯識)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이번 호부터 불교 수행의 핵심을 체계화한 유식(唯識) 사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유식이란 무엇인가>를 격월로 연재한다


석가는 ‘자아가 없다’는 무아(無我)를 설했는데, 대승 유식불교는 ‘오로지 식(識)만 있다’는 ‘유식(唯識)’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있는 그 식(識)은 어떤 식인가?식은 나 또는 너의 식일 텐데, 나 또는 너라고 할 자아가 없는데, 어떻게 식이 있단 말인가? 게다가 어찌 식만 있단 말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아와 유식의 의미를 살펴보자.


무아(無我)를 해석하는 관점 1: 아공법유

 “색은 무상하다. 무상하므로 괴롭고 괴로우므로 나(我)가 아니다. 수상행식 또한 이와 같이 무상하다. 무상하므로 괴롭고 괴로우므로 나가 아니다.”(『잡아함경』)석가는 우리가 각자 자신으로 알고 집착하는 색수상행식 5온(蘊)은 무상하고 괴로우며 따라서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무아’를 설했다. 5온은 여러 가지 조건인 중연(衆緣)의 화합물, 중연(연)으로 생겨난(기) 연기(緣起)의 산물일 뿐이며,우리가 흔히 자신으로 여기는 단일한 자아, 상주불변하는 자아가 아니다. 5온은 인연이 화합하면 나로 나타나지만, 인연이 다하면 곧 흩어져 사라지고 만다. 마치레고 조각을 조합해 한바탕 놀고 나서 해체하면 다 사라지고 없는 것과 같다. 그렇게 나나 너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중연이 화합해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따라서 사라지는 것, 본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상주불변하는 단일한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레고 조각으로 합체된 장난감 하나가 자신을 영원한 자아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석가는 인간 삶의 고통은 바로 그러한 착각과 망상, 아상과 아집에서 비롯된다고 보며, 따라서 삶의 고통을 넘어서게 하기 위해 무아를 설했다.
 석가의 무아설을 해석하는 첫 번째 버전(관점 1)은 이와 같이 무아설을 해체주의적 요소론으로 읽는 것이다. 중연 화합물인 5온은 실유(實有)가 아니고 그 5온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색온을 구성하는 안・이・비・설・신 그리고 색・성・향・미・촉 등 물리적 요소들 나아가 수상행식 등의 심리 상태를 구성하는 관념(이데아) 내지 논리적 요소들은 더 이상 분할되지 않는 궁극 요소로서 실유(實有)의 존재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이 상좌부 계통의 한 부파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가 무아설을 해석한 관점이다.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는 자아는 없지만, 그 자아를 구성하고 세계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은 실재한다. 유부는 존재하는 요소들을 크게 5부류로 나누고 다시 더 세분해 75가지로 규정한다. 요소들로 구성된 현상세계의 사물들과 그 속의 자아는 실재하지 않지만, 그들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75가지 법체는 각각의 본질, 자성(自性)을 가진 것으로 실재한다. 즉 구성된 현상세계 속 자아는 없지만,세계를 구성하는 법체는 있다. 한마디로 아공(我空) 법유(法有)이다. 무아를 인무아(人無我)로만 해석한 것이다.
 관점 1은 요소의 화합물은 허구이지만, 화합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실재한다고 본다. 화합물은 요소들 간의 배치와 결합으로 생겨나는 것이지 여러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내거나 관장하는 단일한 나, 실체적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상을 요소들로 환원해 설명하는 관점 1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이나 마음은 요소들의 결합에서 비롯되는 이차적 산물일 뿐이다. 요소들이 화합하면서 화학반응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창발적으로 의식 및 자의식이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된다. 지금 내가 결합 해놓은 레고 합체물이 자의식을 갖는다면 이상하겠지만, 수십 억 년 전 자연이 합쳐 놓은 물질로부터 진화 과정을 거쳐 생명이 생겨나고 의식 및 자의식이 출현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의 무아론을 관점 1로 해석하면, 불교는 현대 과학과 상통하는 점이 많아진다. 진화론, 유전자론, 뇌과학, 인공지능학 등 현대 과학은 자의식을 물질의 산물로 보고,마음을 정보 처리 시스템의 정보 처리 기능으로만 간주한다. 오늘날 상좌부 계통의 남방불교에 심취한 사람들이 불교를 현대 과학의 시선으로 읽어내려고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무아를 해석하는 관점 2: 아공법공

 석가의 무아설이 과연 자아를 그 구성 요소로 해체해 설명하는 요소론일까? 석가는 무아에 대해 “단단한 재목을 얻으려고 파초나무를 잘라 그 잎사귀를 차례로 벗겨보아도 도무지 단단한 알맹이를 찾을 수 없는 것과 같다”(『잡아함경』)고 설명한다. 5온을 아무리 분석하고 해체해도 그 안에 단단한 핵, 궁극적 요소는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구성된 자아가 공일 뿐 아니라 자아 및 세계의 구성 요소라고 생각되는 법체 또한 공이다. 이렇게 보면 불교의 무아설은 구성된 자아의 실재성만 부정하고, 그 합성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그 자체로 실재하는 실체, 법체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합성물과 마찬가지로 요소들 또한 연기의 산물이다. 말하자면 인연 화합으로 생성되지 않은 궁극 요소, 궁극적 실체, 법체란 없다. 인연 화합의 과정은 무한 소급되며, 무한 소급을 끊는 첫 항은 없다. 더 이상 그보다 더 작은 것으로 분할될 수 없는 것, 더 이상 해체될 수 없는 것, 그런 궁극적 실체란 없다. 그렇게 아공(我空) 법공(法空)이다. 무아를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를 포괄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석가의 무아설을 자아뿐 아니라 전체 현상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 또한 실재가 아니라고 해석하는 것이 불교의 무아설 해석의 두 번째 버전(관점2)이다. 아공법유 대신 아공법공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부의 법실체론을 비판하는 대승 중관의 관점이다. 중관은 유부가 석가의 무아설을 요소론 내지 환원론적 법실체론으로 왜곡하는 것을 비판하며, 일체는 “무자성(無自性)이므로 공이다”라고 주장한다. 일체를 유전자나 뇌신경이나 정보의 연합으로 설명하는 현대 과학의 물리주의에 대한 비판을 선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관에 따르면 우리가 주관으로서의 나라고 여기는 아(我)뿐만 아니라 나 바깥의 객관세계라고 여기는 법(法) 또한 실유가 아니다. 현상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법체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색이 곧 공이라는 “색즉시공”을 말하고, “무색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내지무의식계”(『반야심경』)라고 말한다.5온 12처 18계가 모두 공이라는 것이다.
 관점 2에 따르면 심리적 실체가 없을 뿐 아니라 우리를 떠받친다고 생각하는 물리적 실체, 분할 될 수 없는 기반, 굳건한 바닥 또한 없다. 석가의 통찰은 우리의 심리적 마음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물리적 기반을 세우고자 한 것이 아니다. 무아설은 심리적 실체도, 물리적 실체도 없다는 것, 일체가 인연 화합의 산물이고, 거기에 절대적 출발점이 없다는 것, 일체가 그렇게 허공 중에 떠 있다는 것, 우리의 발밑에 우리를 떠받치는 바닥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석가가 무아설로써 우리에게 일깨워주고자 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바닥 없음,근본 없음, 실체 없음의 깨달음, 아공법공의 깨달음, 한마디로 공(空)의 깨달음이다. 그런데 공의 깨달음은 우리를 일종의 역설에 빠뜨린다. 바닥 없이 우리가 어떻게 서 있을 수 있을까? 근본 요소 없이 세계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을까? 일체가 공이라면, 어째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일까? 공의 깨달음이 일으키는 가장 큰 역설은 바로 이것이다. 일체가 공이라면, 공을 깨닫는 그 깨달음, 그 마음도 공인가? 바닥이 치워질 때 그 바닥 없는 무한의 심연을 바라보는 마음, 그렇게 공을 깨닫는 마음,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마음, 그게 해탈한 마음, 부처의 마음은 과연 어떤 마음인가?

무아를 해석하는 관점 3: 유식(唯識)의 가아가법

자아와 세계의 공성을 깨닫는 마음은 그 깨달음의 순간 스스로 공이 되어 자신을 공으로 자각하는 마음, 한마디로 공의 마음, 빈 마음이다. 공의 마음은 무아이기에 없지만, 무아임을 알기에 없다고 할 수 없는 마음, 그렇게 자기 부정의 역설을 통해 비로소 드러나는 마음이다. 석가의 무아설은 바로 이 공을 깨닫는 마음, 공의 마음, 부처의 마음을 일깨우기 위한 교설이다. 이것이 석가의 무아설을 해석하는 세 번째 버전(관점 3)이다. 유식의 식(識)은 바로 이러한 공을 깨닫는 마음, 스스로를 공으로 아는 마음을 말한다. 그것은 바닥 없는 심연의 마음, 일체 한계를 넘어선 무한의 마음, 상대가 없는 절대의 마음, 자기 바깥이 따로 없는 무외(無外)의 마음이다. 이것이 유식이 말하는 우리의 본래의 식, 본식(本識), 즉 제 8아뢰야식이다. ‘오직 식일 뿐 식 바깥에 대상이 따로 없다’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아나 세계라고 집착하는 아와 법은 모두 이 바닥 없는 심연의 마음 안에서 갖가지 인연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허망한 현상, 가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이 무외의 마음인 아뢰야식 안에서 펼쳐진다. 아와 법은 식 바깥의 실재가 아니고 식 안에서만 존재하고 식에 대해서만 존재한다. 아와 법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유(實有)가 아니라, 식의 전제 위에서만 가정적으로 또는 임시적으로 존재하는 가상적 존재, 가유(假有)이다. 가아(假我) 가법(假法)인 것이다. “가(假)로서 아와 법을 말한다. 아와 법의 갖가지 모습은 모두 식의 전변에 의거한다”(유식삼십송) 아뢰야식 안에 축적된 무수한 업력(종자/정보)이 구체화하고 현재화하는 과정, 아뢰야식의 전변(轉變) 또는 변현(變現) 활동을 통해 아와 법이 만들어진다.
 이처럼 개별적 자아를 포함한 현상세계 전체를 식의 전변 결과로 보는 것은 마치 우주 전체를 빛의 투사로써 허공 중에 만들어진 홀로그램 우주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 중생의 본식인 마음은 빛을 투사하는 광원에 해당한다. 우리는 홀로그램 속에 갇힌 존재, 홀로그램 안에 나타나는 일개 등장인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각자 광원으로서 홀로그램 우주 전체를 만들면서 그 안에 다시 자신을 그려 넣는다. 마치 꿈을 꾸면서 꿈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 자신을 등장시키는 것과 같다. 우리는 한판 놀이 속에 등장하는 하나의 장난감, 레고 합체물, 놀이의 대상이 아니라, 그 한판 놀이를 만들어내고 주시하고 알아차리는 놀이의 연출자, 놀이의 주체인 것이다.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서양 철학(칸트)을,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불교철학(유식)을 공부했다. 현재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칸트와 초월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 『유식무경: 유식 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불교철학과 현대 윤리의 만남』, 『대승기신론 강해』, 『심층마음의 연구』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철학의 원리로서의 자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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