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시인이 읽어주는 불교 詩_불멸

문태준 시인이 읽어주는 불교 詩

불멸

장석남


나는 긴 비문(碑文)을 쓰려 해, 읽으면
갈잎 소리 나는 말로 쓰려 해
사나운 눈보라가 읽느라 지쳐 비스듬하도록,
굶어 쓰러져 잠들도록,
긴 행장(行狀)을 남기려 해
사철 바람이 오가며 외울 거야
마침내는 전문을 모두 제 살에 옮겨 새기고 춤출 거야

꽃으로 낯을 씻고 나와 나는 매해 봄내 비문을 읽을 거야
미나리를 먹고 나와 읽을 거야

나는 가장 단단한 돌을 골라 나를 새기려 해
꽃 흔한 철을 골라 꽃을 문질러 새기려 해
이웃의 남는 웃음이나 빌려다가 펼쳐 새기려 해
나는 나를 그렇게 기릴 거야

그렇게라도 기릴 거야

장석남 시인은 1965년 덕적도에서 태어났다.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아주 이른 나이에 시인이 되었다. 이 시는 2017년에 펴낸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에 실려 있다. 제목은 「불멸」로 되어 있으나 실은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다는 생각을 드러낸다. 한철 피는 “꽃을 문질러 새기려”는 것이고, “웃음이나 빌려다가 펼쳐 새기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비문을 읽으면 곧 바스러질 갈잎 소리가 나고, 눈보라나 바람처럼 흐르고 이동하는 주체들만이 읽게 한다는 것이니 이러한 비문은 무상(無常)함의 노래에 해당하는 것일 테다.

이러한 무상함에 대한 사유는 시 「여행의 메모」에서도 잘 드러난다. 시인은 이렇게 읊었다. “이 여행은 순전히/ 나의 발자국을 보려는 것/(…)/ 나의 걸음이 더 낮아지기 전에/ 걸어서, 들려오는 소리를/ 올올이 들어보려는 것/ 모래와 진흙, 아스팔트, 자갈과 바위/ 낙엽의 길/ 거기에서의 어느 하모니/ 나의 걸음이 다 사그라지기 전에/ 또렷이 보아야만 하는 공부/ 저물녘의 긴 그림자 같은 경전/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끝없는 소멸을/ 보려는 것.” 조주 종심 선사께서는 “비가 오지 않아도 꽃은 지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풀솜은 절로 날아다닌다”라고 이르셨던 것처럼 쇠락과 소멸에 이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장석남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시간이 갈수록 이승과 그 너머의 여정을 생각하게 됐다. 이제는 좀 더 근원에 대해 묻게 됐다”고 밝혔다. 1997년 영화 <성철>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성철 스님을 연기하기도 했으나 개봉되지 못했다. 전국의 사찰을 기행한 경험을 신문에 연재하고, 때때로 절에서 한철을 지내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장석남 시인의 시 세계에 불교의 세계관이 보다 짙게 드러나고 있다는 게 평단의 평가이다. 선가(禪家)의 선풍이 그의 시편들에 유입되고 있는 것이다.




문태준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등이 있다.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불교방송(BBS)』 제주지방사 총괄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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