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이란 어떤 경전인가 | 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불교 경전 길라잡이

『금강경』 (1)


『금강경』이란 어떤 경전인가


원빈 스님 

송덕사 주지, 행복문화연구소 소장



『금강경』의 시작

 한국 불교는 『금강경』을 참 좋아합니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소의경전이기도 하기에 이 경전의 뿌리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금강경』의 시작에 대한 가설은 두 가지 갈래로 나뉩니다. 전통적 중국 『금강경』식 가설과 현대적 인도 『금강경』식 가설로서, 이 중 전통적인 관점은 중국 불교의 교상판석을 근본으로 합니다. 

대표적 교상판석으로 손에 꼽히는 천태지의 스님의 오시교판은 대소승 경전을 모두 부처님의 직설로 여기는 것이 특징입니다. 부처님의 성불 이후의 삶을 49년으로 보고 「화엄부」 21일, 「아함부」 12년, 「방등부」 8년, 「반야부」 21년, 「법화부」 8년으로 배치하는데 이는 역사적 기준이 아닌 법에 대한 주관적 차제를 기준으로 합니다. 

많은 불자들이 지금까지도 이 교판을 역사로 여기는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사료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설을 제시하는데 이를 알아두는 것은, 하나의 가설에 대한 법집을 경계해 균형감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금강경』의 주인공, 수보리

경전을 한 편의 연극 대본으로 본다면, 주인공은 ‘부처님 + 누군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본인의 주장을 독백하는 분이 아니라, 의문에 대한 답변을 하시는 분입니다. 경전은 결국 누군가의 의문에 대한 답변이기에, 그의 특성이 연극의 주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금강경』의 또 다른 주인공인 수보리 존자를 바라보는 전통적인 관점은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는 별칭에 묻어납니다. 이는 『금강경』의 주제를 반야로 좁혀서 바라보는 관점을 반영하는 것인데, 초기 불교에 드러나는 수보리 존자의 별칭은 사뭇 다릅니다. 『앙굿따라 니까야』 「으뜸품」에는 80가지 분야의 으뜸 제자를 손에 꼽고 있습니다. 이 중 수보리 존자는 두 가지 분야에서 으뜸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평화롭게 머무는 자들 가운데서 수부띠가 으뜸이다.”

 “공양받을 만한 자들 가운데서 수부띠가 으뜸이다.”

수보리 존자는 급고독 장자의 동생으로서 제따와나(기수급고독원) 개원 법회에 참석했다가 처음 부처님을 친견했다고 합니다. 그는 법문을 듣고 큰 환희심으로 출가했는데, 이후 자애와 함께하는 선 수행을 통해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의 수행 이력을 보자면 자비와 반야 중 자비를 근본으로 한다는 것이 눈에 띕니다.

수보리 존자의 자비로운 모습은 일상적 탁발에서도 묘사됩니다. 그는 탁발하는 집 문 앞에 설 때마다 시간을 내어 자애 삼매에 입정했다고 합니다. 그는 출정해 집 안의 사람들에게 신호를 준 후 본인이 가장 자비로운 마음 상태일 때 불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를 만난 불자들에게 수보리 존자는 자비의 화신으로 비춰지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자비로운 특징이 수보리 존자의 두 가지 으뜸을 결정했을 것입니다.

자애 수행을 원인으로 불자들에게 가장 자비로운 모습을 보였던 수보리 존자가 왜 한국 불교에서는 해공제일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된 것일까요? 주인공을 바라보는 관점의 작은 뒤틀림이 만들어낸 『금강경』의 주제 변화를 바로잡을 때, 본뜻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금강경』의 키워드는 해공, 즉 반야만이 아닌 반야와 자비의 합일된 마음인 보리심입니다. 


해탈에서 성불로의 전환

부처님은 아라한입니다. 반면 아라한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이는 해탈과 성불의 차이인데, 성불이란 ‘해탈 + 일체지’입니다. 초전법륜을 근본으로 수행한 초기 제자들은 아라한이 되는 수행에 만족했습니다. 부처님은 본래 특별한 분이기에 아라한들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후오백세가 지나는 동안 해탈을 넘어 일체지를 얻고자 하는 이들이 세력을 형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보살승입니다.

“세존이시여!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남자 선여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이 수보리 존자의 질문은 『금강경』 전체를 꿰뚫는 보살승의 문제의식입니다. 초기 불교에서 보살은 오직 부처님의 전생뿐입니다. 이는 매우 특별한 존재만이 성불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었습니다. 보살승 운동은 이 고정관념을 극복하고자 노력한 일종의 종교개혁입니다. 『금강경』이 결집된 후 성불의 길은 모두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누구나 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아무나 보살이 될 수는 없습니다.’

보살승은 보살이 될 수 있는 조건을 수기에서 발보리심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수기를 받는 확률은 매우 희박한 반면,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은 비록 어렵더라도 누구나 가능합니다. 『금강경』은 보리심을 일으켜 성불의 길을 걷는 보살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보리심을 일으켜 수행한다는 것은 수행에 대한 초점이 완벽하게 변화하는 것입니다. 아라한이 되어 해탈하는 것이 목적일 때는 그 수행의 초점이 자연히 무아의 지혜에 맞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반야를 통해 열 가지 번뇌의 족쇄를 끊으면, 그 상태를 해탈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리심은 반야와 자비를 함께 지닌 마음이기에, 보살승 운동은 자연히 자비심으로 초점이 변화하게 됩니다.

아라한과 부처님은 무아의 지혜에 대해 차별이 없습니다. 분명 아라한의 다른 별명은 무학, 즉 무아에 대해 더 배울 것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처님과 아라한들은 중생을 구제하는 능력에서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이는 중생을 아끼는 대연민 삼매와 세간과 출세간을 모두 잘 아는 일체지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금강경』이라는 연극은 주인공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과 자신의 차이를 인지하고, 문제의식을 지니게 된다고 설정합니다. 아라한이 문제의식을 지니고 성불의 길을 가겠다는 의도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아라한은 자아의 작용이 멈추었기 때문인데, 이러한 상태에서 성불의 길을 걷기를 서원하는 것이 가능한 원동력은 오직 중생에 대한 자비심 때문입니다. 아라한 수보리는 그저 더 많은 중생을 돕고 싶었을 뿐이고, 이것이 가능한 부처님이 부러웠을 뿐입니다. 이러한 아라한의 발심은 자아를 모두 태운 잿더미에서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불사조의 모습과 같습니다.

보리심을 간단히 표현하자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입니다. 상구보리는 아라한을 넘어 성불의 길을 완성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의미하고, 하화중생이란 이 목표를 이루는 수행법을 의미합니다. 즉 중생을 구제하는 수행으로써 성불의 길에 도달하겠다는 것입니다. 보살승 운동은 수행의 초점을 반야에서 자비심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이는 반야보다 자비심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반야를 닦는다는 의미입니다. 

자비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첫째는 반야의 궁극에 이르러 무아 상태가 되면 의식 발전의 원동력이 소진된다는 문제이고, 둘째는 반야를 궁구하는 동안 중생 구제에 소홀해진다는 문제입니다. 이는 후오백세가 지나는 동안 불교 내부에서 드러난 문제인데, 보살승 운동은 반야와 자비의 합일된 마음인 보리심을 해답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금강경』의 키워드는 반야가 아닙니다. 반야와 자비심을 포함하고 있는 보리심이 키워드입니다. 비록 후대에 전승되는 과정에서 『금강경』이 반야의 노래로 표현된 것은 사실이지만, 자비의 묵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만약 『금강경』을 단순히 반야의 완성을 위한 경전으로만 본다면 이는 동전의 한 면을 전부로 여기는 것입니다. 나머지 한쪽 면을 발견해 경전의 본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리심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해야 합니다. 


원빈 스님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행복문화연구소(http://cafe.daum.net/everyday1bean) 소장으로 있으면서 경남 산청에 있는 송덕사의 주지를 맡고 있다. 『BBS불교방송』 라디오와 TV에서 <행복한 두시>와 <원빈 스님의 최고의 행복학, 불교>를 진행했고, 지금은 『BTN불교TV』 <원빈 스님의 금강경에 물들다>를 진행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같은 하루 다른 행복』, 『명상선물』,『원빈 스님의 금강경에 물들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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