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이 아름답다
다름, 생명
김승현
그린 라이프 매거진 『바질』 발행인
물웅덩이를 들여다보다
경주에 내려온 이후로 집 앞 강변과 들판을 돌아다니는 것은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글이 잘 풀리지 않아서, 날이 좋아서, 비가 시원하게 와서, 그냥 걷고 싶어서 등등 온갖 이유로 말이다. 다양한 그 이유 중에 절대 빠뜨릴 수 없는 이유는 온갖 자연 구경이다. 한번 해본 사람은 안다. 그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예전 서울 흑석동에 터를 잡고 살 때 한강변에 자주 산책을 나갔었다. 간혹 발 바로 아래 흐르는 한강에 물고기라도 보이지 않으려나 한참을 쳐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흔히 볼 수 있는 시멘트 덮인 강변이라, 정비된 강변은 의례히 그런 거라 생각하고 살았다. 나무가 있기는 하지만 자연적으로 자라난 것이라기보다는 잘 정비된 조경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하지만 옮겨간 회사 사무실 앞에 있던 양재천은 충격이었다! 이런 곳이 있다니! 물에서 자라는 풀이 있었다! 날아오는 새가 있었고, 무릎 정도까지 올 것 같은 물속에는 물고기도 보였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니! 출근길, 퇴근길이 정말 좋았다. 일부러 양재천을 들여다보려고 버스를 타는 대신 걸어 다녔다. 비가 오지 않는 한 양재역에서 양재천에 있는 징검다리를 건너다 물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일과였다.
어떻게 인연이 닿아 경주에서 주로 일을 하게 되면서, 이곳은 나에게 더 많은 자연을 만나게 해주었다.
하루는 북천에 있는 징검다리를 걷다가 녹조의 정체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날이 워낙 더워지다 보니, 강물에는 녹조인가 싶은 것이 마구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녹조를 정확하게 모르지만 강을 덮고 있는 녹색이니 그럴 거라 혼자 지레짐작했다. 아무튼 저것이 저러다 강을 다 덮어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내가 아는 녹조는 물을 썩게 만드는 것인데, 썩어가고 있을 그 물에서 백로가 하얗고 꼿꼿한 자세로 물고기를 잡아먹고 있었다. 왜가리도 있었다. 갑자기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기로 했다. 징검다리를 내려가 강변에 있는 강과 연결된 물웅덩이에 가까이 갔다. 물웅덩이 옆에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녹조라고 생각했던 것은 여러 가지 수초였는데, 모습도 연초록의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수초부터 잎이 참나물 잎사귀처럼 생긴 수초까지 다양했다. 소금쟁이 한 마리가 물결을 일으키며 저편으로 갔다.
소금쟁이를 따라 옮겨가 눈이 머문 곳에는 무언가 옹글옹글 까만 돌멩이 같은 것들이 물속에 잔뜩 있었다. ‘뭐지?’ 하고 들여다보는데, 물은 맑았으며, 그 속에는 다양한 크기의 우렁이, 다슬기, 이름 모르는 물고기 등이 살고 있었다. 한 우렁이는 물 표면 바로 아래쪽을 기어가고 있었는데, 정말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물 표면을 기어가는 우렁이라니…. 그 외에도 먹이를 먹고 있는 듯한 모습, 두 우렁이가 인사를 나누는 듯 가까이 안는 듯한 모습 등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이 작은 세계의 다채로움에 한참을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이 우렁이와 수초들이 물을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백로나 왜가리가 녹조가 있는 줄 알았던 이 강변에서 왜 그리 열심히 먹이 활동을 하고 있었는지 이해되었다. 내가 몰랐던 물속의 다양한 풍경을 알게 되어 좋았고, 몰랐기 때문에 무지한 생각을 했음이 부끄러웠다.
네가 있어 내가 있다
『금강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모든 중생에 대해 난생, 태생, 습생, 화생,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있다고 했다. 인간과 인간 아닌 것으로 구분해 사는 인간에게 부처님은 이미 다양한 중생, 즉 다양한 생명에 대해 말씀하셨고 이들을 모두 해탈에 들게 해 제도하겠다고 하셨다. 부처님의 말씀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그 모습과 생각 유무에 관계없이 모두 소중한 생명임을 말씀하신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라고 하는 아상에 사로잡혀 인간만이, 나와 같은 카테고리가 하나라도 있는 인간만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잔혹함까지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 틱낫한 스님은 『반야심경』에서 종이의 비유를 들어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다. 생물 다양성 보존을 위해 자주 언급되는 멸종 위기 동물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그들이 생태계에 있는 그저 하나의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모두 영향을 주고 있다. 1958년 중국에서는 참새가 낟알을 많이 먹어, 인간이 먹을 곡식이 줄어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참새를 해로운 동물로 지정하고 참새 소탕 작전에 나섰다. 이때 참새는 멸종에 가까울 정도로 사라졌다. 참새가 사라졌으니 그다음 해 풍년이 될 거라 예상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흉년이었다. 참새가 사라지자 해충이 들끓어 오히려 수확량이 확 줄어들었다. 이러한 사례는 전 세계 곳곳에 널려 있다.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모두 알지 못한다. 아무 의미 없다 생각할 수 있는 개구리밥조차 논에 댄 물을 정화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어느 것 하나 서로에게 신세 지지 않고 있는 것이 없음에도, 이를 자주 간과한다.
다양성이 공존하는 세상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나와 다른 생명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데서 시작한다. 『금강반야바라밀다경』에 나오는 ‘나 없는 진리’를 통달했을 때 우리는 현재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모든 생명을 소중히 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이치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깨달을 때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는 법. 행동만이라도 아주 작은 동물과 식물까지도 소중히 여기고, 음식을 절제하며, 불필요한 소비를 줄여나갈 때 점점 더 ‘나 없는 진리’에 가까워져가는 길이 될 것이다. 또한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어떤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잠시 행동하기 전에 생각해보는 것으로 진리의 길에 가까워질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한강변의 옹성과 같은 시멘트 벽을 뜯어내고, 강을 있는 그대로 흐르게 하는 모습을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멘트 벽을 걷어낸 자리에 흙이 쌓이고, 풀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곳을 안식처 삼아 다양한 새들이 사시사철 날아오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강변에는 수초가 자라나고 우렁이나 다슬기 같은 동물들이 돌아와 물을 깨끗하게 해주겠지? 그리고 거기에 떠나버린 버들치 같은 깨끗한 물에 사는 물고기들이 돌아오지 않을까? 더 풍성해진 강변을 거닐며 우리의 삶도 좀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인간이 다른 생명을 더 이해하고 인정하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서로 다른 사람에 대해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를 상상해본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다툼이 멈추는 평화로움을 상상해본다. 평화로움을 넘어 서로의 다름이 더 나은 지구를 위한 시너지가 됨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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