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불교 이야기
엄마가 들려준 불교 소리,
40년 국악 인생으로 이어져
성의신
해금 연주자, 천태예술단 단장
언젠가부터 나의 음악은 정통 국악에서 불교음악으로 그 무게중심이 시나브로 이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불교음악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수십 년간 한 분야에만 몰두했던 사람이 성격이 다른 분야로 방향을 전환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 또한 그렇다. 40여 년간 국악에 몸담으면서 불교음악을 병행하고 있지만, 온전히 불교음악으로의 방향 전환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남들보다는 수월했다. 아마도 그건 엄마 덕분이 아닐까 싶다. 엄마는 손이 귀한 집안에 시집을 왔다. 그래서 자식을 낳아 대를 꼭 이어야 하는 무거운 사명감을 늘 마음에 안고 사셨다. 엄마는 하루도 빠짐없이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자식이 생기기를 기원했고, 수차례의 백일기도를 올리며 정성을 다해 기도한 덕분에 나를 갖게 되셨다.
매일 절에 다닌 엄마 덕에 나는 엄마 뱃속에서 불교의 소리를 태교 음악으로 들은 거였다. 그리고 어렸을 때는 엄마를 따라 절에 가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게는 불교가 종교였다기보다는 엄마와 함께하는 일상이었다. 이제는 엄마와 일상을 함께할 수 없기에, 불교의 소리를 들으면 엄마 생각에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필자는 중학교 때부터 국악을 접했다. 당시 가야금을 배웠는데, 종종 인근 사찰의 법당이나 툇마루 등에서 스님과 신도들을 관객으로 모시고 연주를 하곤 했다. 연주하던 여중생을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던 스님의 격려와 칭찬으로 나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선 해금을 전공했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 입학, 지금까지 해금 연주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필자는 학업과 함께 독실한 불자였던 엄마 덕분에 불교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엄마 손에 이끌려 절에 다녔다. 그러다가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내 발로 신촌에 있는 성룡사에 찾아가 청년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러면서 나의 종교관이 생겼다. 당시는 10·26사태 등으로 대학에서 휴강이나 휴교가 잦아 학교보다는 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 시간이 정말 좋았다. 부처님 오신 날엔 평소보다 더 분주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특히 제등 행렬을 준비하느라 밤을 지새우면서 등(燈)을 만들었고, 여의도광장에서 종로까지 제등 행렬을 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기도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20대의 피 끓는 청춘이었으니 가능했을 것이다. 또 가끔 사찰에서 연주할 기회가 생기면 학교 친구들과 풍류팀을 만들어 영산회상, 천년만세 등 전통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대학교 수업 시간에 영산회상의 염불도드리와 육자염불의 관계 등에 관해서 연구하기도 했고, 범패 종목의 중요무형문화재이셨던 박송암 스님을 뵙고 범패에 대한 궁금증을 여쭤보기도 했다. 대학 시절은 불교음악에 대한 궁금증과 미지의 불교음악에 대한 답답함이 공존했었던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한 후 KBS국악관현악단에 입단하면서 여러 장르의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음악을 보는 시각이 조금씩 넓어졌다. 그러던 중 1993년 KBS국악관현악단 단원들과 마하연실내악단을 창단하면서 이 시대의 불교음악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불교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설렘으로 가슴이 벅차기도 했다. 마하연 활동을 설렘으로 시작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새로운 곡 제작을 의뢰했는데, 곡이 나오질 않아서 준비한 공연을 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성악을 배제한 기악곡은 더 한계에 부딪혔다. 당시 작곡자들은 한결같이 “불교음악이라는 용어가 생소해 접근 자체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합창단 반주를 하거나 기존의 곡을 연주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이 때문에 새로운 창작 불교음악에 대한 목마름은 갈수록 깊어졌다. 그 당시 나의 음악 세계에 대한 고민도 하고 있던 터였다. 이도저도 안 될 것 같아 결국 나의 음악에 주력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물이 1집 음반인 성의신 해금 소리 <Moon in the clouds>다. 이 음반이 국악 음반으로서는 드물게 소위 ‘히트’를 쳐 필자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음반에도 불교적 정서를 담은 두 곡을 수록하는 등 내 마음 깊은 곳에는 항상 불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3집 음반 <12송이 연꽃노래>는 찬불가를 해금으로 연주한 온전한 첫 찬불가 음반이다. 4집 음반 <미래회상>은 영산회상이 불교음악이라는 내용을 부각하기 위해 발표한 음반이다. 발매 후 공연을 했는데, 불교계는 물론 국악계에서도 인정을 받아 KBS 국악대상 대상을 받았고, 불교계에서는 대한불교진흥원이 수여하는 대원상과 행원문화재단이 시상하는 행원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미래회상>은 ‘향후 나의 음악의 방향을 불교음악으로 삼고 전념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만든 음반이라는 점에서 내 음악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음악과 종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불교음악을 대표하는 범패가 우리나라 음악의 3대 성악곡에 들어갈 만큼 불교음악은 한국 전통음악에 기반을 둔 우리 음악의 큰 기둥 중 하나다. 불교음악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대중과 호흡해왔다. 21세기의 불교음악도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불교음악이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정서를 담은 불교음악이어야 한다. 그것이 곧 ‘한국적인 불교음악’, ‘이 시대와 호흡할 수 있는 불교음악’이 아닐까 싶다.
이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마하연실내악단에선 영산재의 주요 9곡을 재해석한 <마음으로 올리는 나의 노래>를 음반과 함께 발표했다. 아울러 이 시대에 맞게 포교하고자 대한불교진흥원의 후원을 받아 매년 네 차례가량 ‘찾아가는 음악회’를 진행하며 불교 정신이 깃든 음악을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했다. 개인적으로는 스님의 법문과 음악이 어우러진 음악 법회인 ‘담마 콘서트’를 기획했다. 2017년 9월 9일 첫 ‘담마 콘서트’를 연 이후 지금까지 사찰에서 불자들을 만나고 있다.
이와 같은 음악 활동을 하며 쌓은 경험 덕분인지 대승불교 최고 경전인 『묘법연화경』 전품을 교성곡으로 제작하는 대작 불사의 실무를 담당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세 명의 작곡가와 함께 제작한 <법화광명의 노래>는 ‘가장 한국적인 불교음악’, ‘이 시대와 호흡하는 불교음악’이라고 자부한다.
사실 13년 전쯤, 『묘법연화경』 「서품」을 읽고 난 뒤 뮤지컬 제작까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나의 서원이 실현된 셈이다. 이 교성곡은 2019년 8월 25일 대한불교천태종 총본산인 단양 구인사 대조사전 앞마당에서 초연한 ‘묘음으로 피어나는 하연 연꽃’으로 피어났다. 『묘법연화경』 전품 28품과 서곡 회향을 합해 총 30곡을 1,300여 명의 천태합창단과 60명의 마하연국악단, 여러 분야의 솔리스트가 함께한 무대였다. 그때를 돌이키면 지금도 가슴 벅찬 감동이 물밀 듯 밀려온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나의 음악 인생이 불교음악으로 귀결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고 여긴다. 내가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 엄마는 범종, 풍경, 목탁, 염불 등 불교의 소리를 자주 들려주었다고 하셨다. 기억은 못하지만 그때 영혼에 새겨진 장엄한 불교의 소리들이 불교음악과의 인연으로 이어져 지금의 나를 있게 했을 것이다. 나에게 불교음악은 자연스러운 일상이며, 삶의 길잡이와 같다. 지금까지 나는 ‘꼭 불교음악을 해야 해’라고 의도하진 않았음에도 나의 음악은 불교음악과 자연스럽게 한 몸처럼 이어지고 있다.
올 초 KBS 국악관현악단에서 정년퇴직했다. 그러다 보니 여유 시간이 좀 늘었다. 그동안 바삐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한 숨 쉬어 가고 싶어 잠깐 멈추었더니 점점 게을러지는 나를 보게 되었다. 그간 쌓아놓은 음악적 성과를 되살리고 싶다는 열정이 되살아나고 있다. 앞으로 내가 활동할 수 있는 동안은 불교음악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나의 이 서원이, 나의 생을 넘어서도 멈추지 않고 이어지길 부처님전에 향을 사르고 두 손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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