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당의 의병과 고뇌 | 불교와 폭력 2

불교와 폭력 2


사명당의 의병과 고뇌


김진영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머리말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1544~1610)은 조선 중기인 임진왜란 전후 시기를 살다간 고승(高僧)이요, 왜적과 싸우고 담판해 국토를 지키고 수많은 포로를 귀환시킨 승대장(僧大將)이며, 경륜 높은 경세가(經世家)요, 또한 뛰어난 시인이기도 하다. 풍천 임씨 사대부 가문에 태어난 그의 호는 사명당(四溟堂), 송운(松雲), 종봉(鍾峰)이며, 밀양 출신으로 임수성(任守成)의 아들이다.

그는 속세를 벗어나 출가 수도승이 되었으나, 국난을 당해 나라의 존망과 백성들의 참혹 처절한 현실이 눈앞에 닥치고, 임금을 지키라는 교서와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격문이 산중에 이르자 승병을 이끌고 즉시 호응했다. 이러한 변란 앞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 된 자의 마땅한 도리다. 그러나 유정은 불살생(不殺生)을 계율로 하는 승려였기에 남달리 고뇌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그에 대한 당대인들의 인식을 살펴보자. 승병장으로서 전란 중에 세운 수많은 전공(戰功)과 외교 교섭을 담당해 일본으로 건너가 포로로 잡혀간 동포를 송환해온 공적은 당대의 국가 대신들과 유가 문사들로부터 존숭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한편 그는 일찍이 선과(禪科)에 급제했고, 선종의 본산이던 봉은사의 주지에 지목되었으며, 큰스님인 서산대사의 입실 제자가 됨으로써 불교계 안팎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그는 인재 등용과 국가 보위의 측면에서 탁월한 견해를 내세움으로써 경세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삶의 역정 속에서 이루어진 그의 작품 가운데, 특히 시 세계에는 전란의 참상을 읊은 작품, 참전의 현실과 수도 생활 사이에 갈등하며 끊임없이 수도자로 돌아가기를 염원하는 자세를 그린 작품, 그리고 진리의 깨달음을 향한 증득의 선시 작품 등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한편 행적을 담고 있는 <석장비명(石藏碑銘)>을 통해서는 그의 남다른 천성과 호방하면서도 깊은 보살심(菩薩心)을 지닌 인간상을 만나볼 수 있다.


그의 시 세계

다음 작품들을 살펴보자.


시월 초사흘 눈 내리는 날에(十月初三日雨雪寫懷 시월초삼일우설사회)

天寒旣至白雪如斗(천한기지백설여두) 추운 절기 벌써 이르러 흰 눈이 함박처럼 내리네 

赤頭綠衣兮絡繹縱橫(적두녹의혜락역종횡) 적두 녹의 왜구들 활개치고 다니는 속에 

魚肉我民兮相枕道路(어육아민혜상침도로) 어육 된 우리 백성 도로에 나뒹구네 

痛哭兮痛哭(통곡혜통곡) 통곡하고 다시 통곡하나니 

日暮兮山蒼蒼(일모혜산창창) 날은 저물고 산은 창창하네 

遼海兮何處(요해혜하처) 아득한 바다는 어드매뇨 

望美人兮天一方(망미인혜천일방) 임금님 바라보나니 하늘 한쪽이네 

1592년 4월에 부산에 상륙한 왜적은 5월에 서울을, 유월에 평양성을 함락하기까지 파죽지세로 진군했다. 난리통의 덧없고 비참한 죽음 앞에 통곡하고 또 통곡할 수밖에 없는 참담한 현실을 사실 그대로 그린 작품이다.


변주서와 이별하며(己亥秋奉別邊注書 기해추봉별변주서)

恭承朝命下轅門(공승조명하원문) 조정의 명 공손히 받고 병영에 내려오니 

夷夏山河到此分(이하산하도차분) 여기 이르러 산하가 오랑캐와 우리로 갈라졌네 

四海風塵猶轉戰(사해풍진유전전) 사해풍진은 아직도 싸우고 있어서 

十年征戍更從軍(십년정수낙종군) 10년 수자리 다시금 종군에 나섰네 

城隅落照看廻鳥(성우낙조간회조) 성 모퉁이 낙조에 돌아오는 새를 보고 

天外歸心望去雲(천외귀심망거운) 하늘 밖 돌아갈 마음에 떠가는 구름 보네 

掃塵妖氛定何日(소진요분정하일) 어느 날에야 요망한 왜구들 쓸어버리고 

撥灰金鴨細香焚(발회금압세향분) 화로의 재 헤집으며 가는 향불 사를까 


대사가 종군한 지도 여러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산사에서 향을 사르며 고요히 수행 정진하는 수도승의 본 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안타까움과 귀향 의식, 요망한 기운 같은 왜구들을 질시하며 쓸어버리고 싶은 간절한 심정이 함께 녹아 있는 작품이다.

조정의 명을 받아 일본으로 떠나면서 대사는 자신을 돌아보며 회한에 젖어든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종군했고 외교 사명도 수행해야 하는 처지지만, 그의 본심은 항상 산사로 돌아가 수행승의 본분을 지키는 데 있음을 피력하고 있다. 그 점은 그가 읊은 시 세계에도 지배적으로 표출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죽도에서 유생의 조롱에 답하며

(在竹島有一儒老譏山僧不得停息以拙謝之 재죽도유일유노기산승부득정식이졸사지)

西州受命任家裔(서주수명임가예) 서주 임씨의 후예로 태어나 

庭戶堆零苟不容(정호퇴령구불용) 가문이 영락하여 몸 둘 곳 없었네 

無賴生成逃聖世(무뢰생성도성세) 의뢰하여 자랄 곳 없어 성세에서 도망하였고 

有懷愚拙臥雲松(유회우졸와운송) 어리석고 못난 생각에 구름 소나무에 누웠네 

山河去住七斤衲(산하거주칠근납) 산하에 멈추고 가는 것은 일곱 근 누더기요 

宇宙安危三尺筇(우주안위삼척공) 우주의 안위는 석 자의 지팡이라오 

是我空門本分事(시아공문본분사) 이것이 우리 공문의 본분의 일이거니 

有何魔障走西東(유하마장주서동) 무슨 마귀의 장애가 있어 동서로 내달리는지 


이 시는 1604년(선조 37년) 조정의 명으로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대마도로 가던 중 죽도에 잠시 머물렀을 때의 소회를 읊은 작품이다. 대사는 그곳의 한 유생으로부터 ‘산승은 산승답게 지낼 일이지 왜 나서서 다니느냐’는 식의 비웃음을 들어야 했다. 그는 유생의 편협한 관점에, 마귀의 장애로 말미암아 어찌할 수 없는 사정에 이리되었노라고 하면서 대범하고 겸허하게 받아넘겼다. 

전란이 지속되는 동안 승군은 용전분투하고도 정규군에 비해 무수한 차별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모두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일이며 수도자의 본분이라 여기고 꿋꿋이 버텨내었던 것이다.

사명대사는 전란 이후에도 계속 종군하며 축성과 수비 업무에 참여해 승려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편견을 불식하는 데 힘썼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모습은 다른 한편에서는 명리승(名利僧)이라는 비난을 살 수도 있었다. 세속에서의 삶이 길어질수록 밖으로 드러나는 생활 방식 또한 다분히 세속적인 성향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 불교계는 승군의 세속화 조짐이라는 전쟁 후유증을 안고 있었다. 당연히 대사에게도 그런 우려와 시기의 눈길이 불교계 안팎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석장비명(石藏碑銘)>에 보이는 사명당의 타고난 천품과 행적

대사는 나면서부터 슬기로우며, 우뚝하게 뛰어나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차츰 자라자 장난질을 좋아하지 않고, 여러 아이들과 냇가에 나가 놀 때에는 혹은 모래를 쌓아 탑도 만들고 혹은 돌을 세워 부처도 만들었다. 그리고는 꽃을 꺾고 밤을 주워다가 거기에 공양했다.

(1) 어느 날 그물질하는 이가 큰 자라 한 마리를 잡아가는 것을 보고는 밤을 가져다가 값으로 주고 사서 연못에다 놓아주니 여러 아이들이 모두 감동해 자기들이 주은 밤을 대사 앞에 가져왔다. 대사는 이를 여러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이를 본 노인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어느 날 그물질하는 이가 큰 자라 한 마리를 잡아가는 것을 보고는 밤을 가져다가 값으로 주고 사서 연못에다 놓아주니 여러 아이들이 모두 감동해 자기들이 주은 밤을 대사 앞에 가져왔다. 대사는 이를 여러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이를 본 노인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불교의 가르침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넘어선다. 곧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 것보다 더 본원적으로 들어간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이 바로 그것이다. 온 생명을 다 한가지로 귀중히 여기는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은, 이른바 만물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양 지배하고 다스린다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뛰어넘는 것이다. 인간만이 존귀한 것이 아니요, 생명체 모두가 소중하므로 사람 편의대로 이를 침탈하고 죽이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아무리 모기나 개미 같은 미물이라 할지라도 생명을 지닌 존재인 이상 함부로 살상하지 않는 마음 바탕이 자리 잡을 때라야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더욱 깊어질 수 있는 이치다.

사명당이 철모르는 어린 시절에도 이미 생명을 남달리 귀히 여겨 살려내고자 한 행적은 타고난 천품이요 불성이 남달랐음을 예증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천성과 근기가 바탕이 되어 수도 정진했으므로 큰스님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2) 임진년 여름 왜적이 유점사에 들이닥쳤을 때 대사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신 것은 원래 중생을 구호하기 위함이었다. 이 왜적들은 성질이 사나워 우리 백성을 몹시 해칠까 걱정이다. 마땅히 내가 가서 저 미친 도둑떼를 달래어 흉악한 기운을 쓰지 말도록 일깨우면 그들도 아마 부처님의 자비스러운 가르침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중략)

당시 영동 아홉 고을의 사람들이 죽음을 면한 것은 대개 대사의 공로라 하겠다.

(3) 선조대왕이 서쪽으로 파천길을 떠나자 의리로써 왜적에 항거하려 하며 강개해 여러 중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 나라에 나서 먹고 쉬고 놀면서 여러 해 동안을 지나온 것은 모두가 임금의 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어렵고 위태로운 때를 당해서 어찌 차마 앉아서 구경만 한단 말이냐.” 즉시 수백 명 승병을 모집해 급히 순안(順安)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여러 의승(義僧)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승병은 수천 명이나 되었다.

이때 서산대사는 조정으로부터 여러 도의 승병들을 총섭(總攝)할 명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늙었다 하며 사양하고 사명대사를 추천해 자기를 대신하게 했다. 이리하여 대사는 승병 대중들을 거느리고 체찰사인 유성룡을 따라 명나라 장수와 협동해 이듬해 정월에 평양의 적을 격파하고 행장(行長)을 물리쳤다. 이어서 대사는 도원수 권율을 따라 영남으로 내려가 의령에 군사를 주둔하고 왜적을 쳐서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많았다. 임금은 이를 아름답게 여겨 당상관(堂上官)의 품계를 제수했다.

(4) 갑진년에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갔을 때 대사는 가강(家康)을 만나 말했다. “우리 두 나라 백성들이 오랫동안 도탄에 빠졌기로 나는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왔다.” 가강도 역시 불교를 믿는 사람이어서 이 말을 듣자 신심을 내어 대사를 부처님처럼 공경하고 이내 강화를 맺고 돌아오게 되었다.

위의 글은 사명대사와 형제 같은 교분이 있었던 허균(許筠)이 지은 비명의 일부다. 본 제목은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사명당송운대사(四溟堂松雲大師) 석장비명(石藏碑銘)>이다. 그는 이렇게 논했다. “아! 대사가 탄생한 때는 바로 시끄러운 말세였다. 대사는 전쟁에 시달리면서 국가와 함께 강한 적을 막느라고, 불법을 선양해 어리석은 무리들을 깨우칠 겨를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대사를 잘 모르는 자는 혹 그가 불법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한갓 세상을 구하기에 바빴다고 탓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이들이 어찌 악마를 죽여 어려운 것을 구제하는 것이 바로 이 불가의 공덕인 줄을 알겠는가.” 허균의 논의는 그 나름의 논리에서 정곡을 얻었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당시 승려의 전쟁 참여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관점이 있었다. 승병장으로 활약한 이들은, “산승의 도리로서 편안하지 않지만, 임금을 위한 마음으로 나섰다”(유정), “산승도 이 땅의 백성이다. 임금이 도성을 빼앗기고 피난을 갔는데, 편안히 앉아 보고만 있을 수 없다”(기허영규)라고 했다. 반면 승려의 본분을 철저히 지키면서 간접적으로만 전란에 참여하자는 주장을 편 이들은, “한사코 승려의 본분을 지켜야 한다”(중관해안), “부처님도 오랫동안 흙 속에 묻혀 있으면 본래의 뜻을 모르고 산다”(정관일선)라고 했다.

전쟁에 참여한 사명대사는 ‘중생의 구제가 부처님이 세상에 오신 뜻’이라는 믿음에 바탕해, 우리 백성뿐만 아니라 일본 사람 역시 전쟁으로 말미암아 도탄에 빠짐을 자비심으로 저들에게 일깨워 강화를 맺고 돌아왔으니, 기실 양국이 다시 평화를 회복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하겠다.


맺음말

사명대사는 출가승임에도 불구하고 수도 정진의 길만 걸을 수는 없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이제까지 없었던 역사적 참화를 당해 분연히 참전함으로써 세속의 길에 나아갔다. 그것도 불가에서는 가장 혐오하고 꺼리는 살생(殺生)의 길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의 삶에 대한 평가 역시 유교와 불교 양쪽 모두에서 시비(是非) 양면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목숨을 내건 충의(忠義)의 행적이나 유가(儒家) 문사들과의 교유 및 경세가로서의 면모는 유가에서는 유가 나름으로 해석하고, 조정에서는 사대부의 관직을 제수해 포상하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대사의 참마음은 이 모든 것이 공명(功名)을 이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보살심의 자비행(慈悲行)이었다고 판단된다.

특히 그의 시 가운데 귀향 의식을 드러낸 많은 작품에서, 공을 이룬 것에 대한 자부심이 일절 표출되지 않고 오히려 본래의 수도처로서의 고향을 오매불망 그리며 안타까워하고 있는 점에서 볼 때, 또 선시(禪詩)에 그려진 시 세계를 볼 때, 사명대사는 오직 일념으로 구체적인 보살도(菩薩道)의 실천이라는 일관된 삶을 추구했고 이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고 판단된다.  



김진영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문학 박사). 국어국문학회, 고전문학교육학회, 판소리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고전문학 전공)로 있다. 주요 저서로 『이규보 문학연구』,『고전작가의 풍모와 문학』, 『한국서사문학논고』, 『한국한시감상』(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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