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세계를 만드는
제8아뢰야식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색・ 심의 이원성과 그 이원적 분별 너머
우리는 일상적으로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 물리세계와 정신세계를 서로 구분되는 것,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한다. 이원론적 사고다. 이러한 이원성을 불교에서는 색(色)-명(名) 또는 색(色)-심(心)으로 표현한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감각기관으로서의 5근(根)과 그 근에 의거해 감각되는 대상으로서의 5경(境)은 색법에 포함된다. 반면 그러한 근과 경의 화합으로 생겨나는 식 그리고 다시 그 근・경・식 3사의 화합인 촉(觸)으로부터 일어나는 느낌(수)・생각(상)・의지(행)・앎(식)은 색 아닌 명(名)에 속하며, 이들은 마음의 작용으로 심(心)에 포함된다.
그런데 색과 심은 서로 다른 것으로 구분되는 측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서로 완전 무관한 별개의 것도 아니다. 여러 자식이 각각 개별적 인격으로서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부모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또는 한 그루 나무에 피어난 수많은 꽃들이 각각의 꽃송이로서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동일한 뿌리의 동일 생명을 공유함으로써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듯이, 그렇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표층에서는 서로 다른 차이나는 것들로 드러나지만, 심층에서는 그러한 차이 너머 작동하는 근본적 활동성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말하자면 표층에서의 이원적 분별은 심층에서의 무분별적 하나의 드러남이다.
유식은 색과 심의 구분을 표층의 차이로 간주하며, 그 둘을 하나로 연결하는 심층의 활동성을 의식보다 더 깊은 심층 마음인 ‘제8아뢰야식’으로 설명한다. 표층에 드러나는 색과 심의 차이는 그런 이원적 현상에서부터 생겨나고 다시 그런 이원적 현상으로 구체화되는 에너지, 힘, 정보인 종자(種子)로 귀결되는데, 종자는 심층 아뢰야식 안에 함장되고 보존되고 활성화되는 것으로서 색심 구분 이전의 심층 마음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현상적 차이 : <심> 표층식(반연심) <색> 반연되는 대상 : 유근신(5근)과 기세간(5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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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의 하나 : 제8아뢰야식(심층식)
종자함장식으로서의 제8아뢰야식
아뢰야식을 ‘제8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앞에 7식이 있다는 것이다. 소위 감각인 전5식, 일체 대상을 지각하고 사유하고 판단하는 분별식인 제6의식, 유근신을 나로 알고 집착하는 ‘나는 나다’의 집착적 자아식인 제7말나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7식은 감각과 생각과 의지로서 우리가 일상 의식의 수준에서도 쉽게 이해하고 감지할 수 있는 식들이란 의미에서 ‘표층식’이다. 표층식은 색과 심이 이원화된 세계에서 작동하는 마음이다. 색으로부터 자극(감각 자료)을 수용하고(전5식), 그 감각 내용을 대상에 속하는 것으로 분별하고(제6의식), 대상 세계 속 나를 나로 집착하는(제7말나식) 식인 것이다.
반면 7식 다음의 제8아뢰야식은 표층에서 쉽게 감지되지 않는 심층식이며, 이 심층식은 표층에서 전개되는 색과 심의 이원성을 넘어선 식이다. 표층의 색심 이원성은 심층 제8아뢰야식 안에 포함되어 있던 종자의 현행화에 의해 비로소 등장하는 현상적 이원성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심층 아뢰야식은 과연 어떤 식인가?
아뢰야식의 ‘아뢰야’는 ‘포함하다’, ‘함장하다’는 뜻으로 아뢰야식은 뭔가를 함장하는 식이다. 아뢰야식 안에 함장되는 것을 유식은 ‘종자(種子)’라고 부른다. 종자는 무엇인가? 불교는 기본적으로 업(業)이 있으면 그 업이 낳는 보(報)가 있기 마련이라는 ‘업보(業報)’를 주장한다. 업은 우리의 표층식, 의식이나 말나식이 짓는 집착적 행위, 표층식의 경험을 말하며, 그러한 업은 보를 낳기까지 그 보를 낳을 수 있는 힘, 기운,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업이 남기는 힘인 업력이 바로 ‘종자’다. 종자는 ‘경험이 남긴 정보’, ‘업이 남긴 세력’, ‘삶이 남긴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업보가 성립하자면, 그러한 정보, 세력, 에너지가 작용 없이 그냥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보(결과)를 낳기까지 어딘가에 잘 보관되어 세력을 유지해야 한다. 즉 종자의 보관소가 있어야 한다. 유식은 그런 종자의 저장소가 바로 우리의 심층식, 심층 마음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종자함장식’이라는 의미에서 ‘아뢰야식’이라고 불렀다.
표층식의 경험이 남긴 정보, 업이 남긴 업력을 ‘종자’라고 부르는 것은 식물이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는 결국 씨(종자)를 남기는 것에 빗대어 한 말이다. 나무가 남긴 종자 안에는 그 나무의 삶의 정보, 삶의 흔적, 삶의 에너지가 모두 담겨 있다. 나무의 잎과 꽃이 바람과 햇빛을 받으면서 겪었던 모든 역사, 모든 경험의 이야기, 정보가 그 씨앗 안에 에너지로 담겨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뢰야식에는 표층식이 일으켰던 업이 남긴 힘, 지난 삶의 기록과 정보가 모두 종자의 형태로서 그 안에 담긴다. 그리고 씨앗이 다시 그다음 나무로 자라나듯이, 아뢰야식 내 종자는 다시 물리적 현상세계를 형성한다.
이상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세 단계로 정리해볼 수 있다. ① 나무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② 겨우내 땅 밑에 보이지 않게 감춰진 채 머무르다가 ③ 봄이 되면 다시 그 안에 담겨 있던 에너지가 구체화되고 현실화되어 새로운 나무로 자라나는 것처럼, ① 7식이 남기는 종자는 아뢰야식 안에 축적되고(현행훈종자 現行熏種子) ② 그 안에서 머무르며 성장하다가(종자생종자 種子生種子) ③ 인연이 갖추어지면 종자가 구체화되고 현실화된다(종자생현행 種子生現行). 씨앗이 자라서 나무의 가지가 되고 꽃이 되는 것처럼 아뢰야식 안에 머물러 있던 종자가 시절인연을 따라 구체화하고 현실화한 결과 유근신과 기세간의 물리세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를 도표화해보면 다음과 같다.
나무 : 나무 → 열매 나무 → 열매
①↓ ↑③
씨앗 : 씨앗 → → → 씨앗
②
세계 : 물리세계 → 7식/경험 물리세계 → 7식/경험
↓ ↑
<현행훈종자> ①↓ ↑ ③ <종자생현행>
↓ ↑
종자 : 종자 → → → 종자
② <종자생종자>
이와 같이 우리가 감각하고 경험하는 물리세계인 유근신과 기세간은 아뢰야식 내 종자가 현행화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유식은 이를 아뢰야식의 활동 산물, 식소변(識所變) 내지 상분(相分)이라고 부른다. 현상의 물리세계가 심층식을 떠나 그 자체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아뢰야식은 어떻게 유근신과 기세간으로 전변하는가?
아뢰야식으로부터 물리세계의 형성
1) 유근신(근)의 형성 : 아뢰야식 안의 종자가 구체화되는 방식이 바로 특정한 몸, 특정한 근을 가진 중생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즉 중생의 근, 근을 가진 몸인 유근신은 아뢰야식 내 종자가 구체화되고 현실화된 결과다. 악업을 많이 지은 자는 그 업력(종자)의 힘으로 지옥중생의 몸(근)을 갖고 지옥계에 태어나고, 선업을 많이 지은 자는 그 업력(종자)의 힘으로 천인의 몸(근)을 갖고 천계에 태어난다. 그리고 인간적인 업을 지은 자는 그 업력(종자)의 힘으로 인간의 몸(근)을 갖고 인간계에 태어나고, 금수와도 같은 업을 지은 자는 그 업력(종자)의 힘으로 축생의 몸(근)을 갖고 축생계에 태어난다. 근이 경험의 축적, 정보의 축적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은 진화론에서도 주장하는 바다. 경험이 반복되고 축적됨으로써 (소위 돌연변이를 거쳐) 그 결과로 새로운 근을 가진 새로운 종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어류에서 파충류, 다시 포유류, 그리고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등등 새로운 근을 가진 종이 생겨난다. 또 경험이 축적되지 않으면 있던 근이 없어지기도 한다. 원래 눈(안근)이 있었던 박쥐가 동굴에 살면서 장기간 보는 경험을 하지 않으니 결국 시력(안근)이 없어지게 된 것이 그런 경우다. 경험의 축적을 통해 근, 인지능력으로서의 근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의 축적을 통한 근의 생성은 생사윤회를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와인 맛을 잘 감별하는 소믈리에는 와인을 맛보는 경험을 통해 그 정보 내지 종자를 많이 축적함으로써 결국 그런 맛을 남들보다 더 잘 감별하는 인지능력을 갖게 되고, 소리를 잘 감별하는 귀명창은 소리를 많이 경험함으로써 정보, 곧 종자를 많이 쌓아서 그런 능력을 갖게 된다. 그렇게 근은 아뢰야식 안의 종자의 축적과 그렇게 축적된 종자의 구체화 내지 현행화 결과다. 그래서 근을 가진 몸인 유근신을 아뢰야식의 활동 산물, 아뢰야식의 식소변이라고 한다. 아뢰야식이 만든 것이라는 뜻이다.
2) 기세간(경)의 형성 :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마음이 만든 것인가? 불교는 처음부터 대상 세계인 경(境)은 그것을 감지하는 근(根)에 상응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논해왔다. 보는 눈 없이 색깔을 말할 수 없고, 듣는 귀 없이 소리를 말할 수 없다. 맛보는 혀 없이 맛이 없고, 냄새 맡는 코 없이 향기가 없고, 만지는 몸 없이 감촉이 없다. 모든 것은 근에 상응해서 그런 것으로 나타날 뿐이지, 모든 근을 떠난 객관적 사물 자체란 있지 않다. 이를 잘 보여주기 위해 유식은 일수사견(一水四見)을 말한다. 우리 인간에게 물은 목마를 때 마시는 음료지만, 물고기에게 물은 우리의 공기 내지 거주공간과 같은 것이며, 천사에게 물은 반짝이는 보석과 같고, 아귀에게 물은 비린내나는 피고름 같다. 대상 세계는 근에 상응해서 그 근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지, 근을 떠나서 객관적으로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즉 근이 형성되면서 상응해서 경도 형성된다. 근이 아뢰야식 안의 종자의 현행화 산물이듯이, 경 또한 아뢰야식 안의 종자의 현행화 산물인 것이다.
근은 내 몸, 유근신이고, 경은 중생들의 몸이 의거해 사는 세계, 기세간이다. 이렇게 유근신과 기세간이 모두 아뢰야식의 활동 산물(식소변)이다. 모두 마음이 만든 것이며 마음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유식이 일체가 모두 마음이 만든 것이라고 말할 때, 그 마음은 우리의 표층식, 의식이나 말나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일체를 만드는 마음은 무수한 지난 생에서의 경험을 정보로 간직하고 있는 식, 무수한 지난 생의 업이 남긴 에너지, 업력을 종자로 함장하고 있는 식이되 바로 지금 내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식, 심층 마음인 아뢰야식이다. 아뢰야식은 내가 지금 나라고 여기는 이 나의 개체성을 훨씬 뛰어넘어 존재하는 식이다. 어쩌면 태초의 순간, 우주 발생의 순간, 130억 년 전 빅뱅의 순간부터의 긴긴 역사를 품고 있는 식, 아니 어쩌면 그 태초보다 더 멀리 시작 없이 무시이래로 존재하는 식이다.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서양 철학(칸트)을,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불교철학(유식)을 공부했다. 현재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칸트와 초월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 『유식무경: 유식 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불교철학과 현대 윤리의 만남』, 『대승기신론 강해』, 『심층마음의 연구』, 『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나는가』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철학의 원리로서의 자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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