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불교 경전 길라잡이|『법화경』 (3)
법화 신앙인이 나아갈 길
차차석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 교수
인간에 대한 초기 불교의 시각은, 계발할 수 있는 성품은 갖추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삼독의 번뇌를 벗어나지 못한 불완전한 존재라는 입장이다. 세상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불에 타고 있다고 설파한 석가모니 붓다의 상두산 설법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법화경』 또한 ‘화택(火宅)의 비유’에서 세상을 불타는 집으로 보고 있다. 불타는 집에서 오욕의 즐거움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이들은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법화경』은 선언하고 있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불타는 집’에서 벗어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자각할 수 있는 길, 삼독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아무리 병에 좋은 약을 주어도 그 약이 좋은지, 나쁜지 알지 못하고 약을 먹지 않는, 그래서 본성을 잃은 아이들처럼(「여래수량품」)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부처님은 그런 중생을 깨우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며, “내가 본래 세운 서원은/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나와 다름없이 동등하게 하는 것”(「방편품」)이라고 선언한다. 이를 「방편품」에서는 일대사인연이라고 해, 중생들에게 부처의 지견(知見: 지혜)을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하고, 지견의 도에 들어오도록[開示悟入] 하기 위해서 세상에 출현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부처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일승법을 설한다고 단언한다.
나와 다름을 포용하는 신앙인
성문, 연각, 보살승의 가르침이 다 부처의 길[불승]에 이르는 가르침이라는 회삼귀일의 방편설은 지금 이 시대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회삼귀일은 불교사적으로는 소승교단과 대승교단의 갈등을 포용, 융합하는 사상이었다. 달리 말하면 나와 다른 견해까지도 포용하는 자세가 바로 회삼귀일이다.
목표가 같다고 해서 똑같은 길만을 갈 수 없는 게 인간 세상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서울로 가는 방법은 너무나도 많다. 개개인의 성향과 능력에 따라 빠르고 더디고, 쉽고 어렵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서울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함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실체도 불분명한 ‘성공’이라는 잣대를 세워놓고 그에 못 미치면 낙오자로 취급하는 세상, 나와 다름, 나와 다른 견해는 무조건 배척하는 세상이 아니던가.
『법화경』은 개개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들 모두가 부처가 되는 길을 말하고 있다. 하늘을 가득 덮은 큰 구름이 크고 작은 약초와 나무들에게 골고루 비를 내리지만, 그 비를 맞고 생장함은 제각기 다르다는 「약초유품」에 나오는 삼초이목(三草二木)의 비유는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법화경』의 사상적 핵심을 잘 보여준다.
정보화 시대가 익어가고 물질만능의 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릴수록 존재자로서의 인간의 모습은 점점 작아지고 있다. 외로움에 지치고 불안에 흔들리는 사람들, 종교인이라면 그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더 나아가 행복하게 살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크고 작은 초목에 한 모양 한 맛[一相一味]의 비를 내려 그들의 생장을 돕듯이 법화 신앙인들 또한 차별 없는 마음으로 이웃을 향해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한다. 회삼귀일은 이렇듯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고 다원화된 견해를 포용해 융합하는 미래지향적인 사상이다.
정신혁명의 사도(使徒)
그렇다면 미래지향적인 회삼귀일의 법화사상을 이 땅에서 구현할 사람은 누구일까? 이에 대한 답은 「법사품」 제10과 「안락행품」 제14-「종지용출품」 제15, 「여래신력품」 제21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법사품」에서 수지·독·송·해설·서사로 법사의 성격을 규정한 경은 「안락행품」에서 신·구·의·서원안락행으로 다시 한번 법사의 책무를 각인시킨 뒤, ‘상투 속의 명주(明珠)’라는 비유를 시설한다. 전륜성왕이 공훈이 가장 큰 장수에게 마지막으로 상투 속의 명주를 내어주듯이, 경 가운데 왕인 『법화경』을 오음(五陰)의 마군을 물리친 현성(賢聖) 장군에게 맨 마지막에 준다는 것이다. 이때 명주는 교법의 정수인 『법화경』인 동시에 불신(佛身)의 정수인 ‘법신사리’를 상징한다. 『법화경』의 용어를 빌리면 일승사상이다. 땅 아래 허공에 있던 지용보살이 땅을 가르고 솟아오르는 것은 바로 이때다.
이것으로 본다면 「안락행품」 제14~「종지용출품」 제15의 구성은 신·구·의·서원이라는 4안락행을 완성한 뒤에, 중생을 일불승의 길로 이끌어주는 법사에게 ⇒ 불신의 정수인 ‘법신사리[명주]’를 수여함으로써 ⇒ ‘지용보살’이 탄생하는 구도로 완성된다. 지용보살이란 시기가 무르익으니까 표면에 등장하는 법화사상의 실천자들을 말한다. 그리고 「여래신력품」 제21에서 세존이 이들 지용보살에게 사바세계에서의 『법화경』의 유통을 부촉한다. 법사에게 명주를 주어 사바세계에서 『법화경』의 홍포를 책임질 지용보살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법화경』이 강조하는 오종 수행을 하는 법사가 곧 지용보살이며, 더 나아가 『법화경』을 수지·독·송하는 신앙자는 누구든 지용보살이 되어 세상을 청정케 하라는 요구라 아니할 수 없다. 첫 회에 언급했듯이 법화 운동가들은 당대의 소승교단은 물론 일부 논리에 치우친 대승운동까지도 비판하며 새로운 불교운동을 일으킨 불교의 개혁가들이었다. 썩을 대로 썩어 문드러진 한국 종교계를 본다면, 법화의 신앙인이 지용보살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을 알 수 있다. 즉 이 시대에도 올바른 불교정신을 정립할 지용보살이 필요하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래의 사도(使徒)가 되어 불교의 혁명, 정신의 혁명을 이끌어야 할 지용보살의 등장이 절실한 시대에 살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행복한 삶의 동반자
불교는 인간 모두에게 3업의 청정이라는 이로움을 주어 마침내는 고(苦)에 벗어나는[해탈, 열반]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다.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길을 떠나라고 했던 석가모니 붓다의 설법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법화경』은 초기 불교의 의도를 아주 적확하게 계승한 대승경전이라 볼 수 있다.
『법화경』은 미묘하고 심원해 쉽게 다가설 수 없는 불교의 핵심 사상을 쉬운 이야기로 전하고 있으며, 그 실천마저도 평범한 행동에서 찾고 있다. 아이들이 장난으로 부처님 상호를 그리거나, 머리만 약간 숙여 불상에 예배를 올리는 것만으로도 미래세에 불도를 성취한다는 「방편품」의 중송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아무리 미혹한 범부라 할지라도 한순간의 선근 공덕만으로도 성불할 수 있다는 이 만선성불론(萬善成佛論)은 번쇄한 불교 교리에 지친 대중들에겐 너무도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작은 선근이 쌓이고 마침내는 『법화경』의 수지·독·송·해설·서사라는 5종법사행이 이루어질 때, 그의 삶은 일상과 수행이 일치하는 참다운 법사로 거듭나는 것이다. 오종행을 실천하는 사람은 재가자라 할지라도 법사가 될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출가자라 할지라도 오종행을 실천하지 않으면 법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시대의 법화 신앙인이라면 바깥을 향한 따뜻한 마음 하나, 작은 손짓 하나부터 실천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법화 사상가들은 형식이 아닌 본질을 추구하며 현실을 이상세계로 만들고자 했다. 성문 제자들도 노력에 따라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이승작불(二乘作佛) 사상과 이를 증명하는 수기(授記)의 시설은 이러한 『법화경』 본연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법화경』은 천이백의 성문 제자는 물론 마하파사파제와 야수다라비구니, 더 나아가서는 악인의 대명사라 할 제바달다에게까지 수기를 내린다. 인간으로서 부처가 되지 못할 이는 아무도 없다는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부처’임을 천명한 것이다.
따라서 법화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상불경보살처럼 내 주변의 모든 이를 ‘장차 부처가 될 존재’로 존중하는 마음을 내어야 한다. 인간을 인간 자체로 존중하는 마음, 생명을 생명 그 자체로 현창하려는 노력, 그리하여 『법화경』이 추구하는 이상세계를 구현하는 지용보살이 되고, 언제 어느 때든 따뜻한 손을 내밀 수 있는 관세음보살과 같은 ‘행복한 삶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작지만 따스한 미소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세상을 따스하게 바라보고 포용하는 자가 관음보살의 화신인 것이다. 사랑의 완성은 멀리 있지 않다. 각자가 바로 관음의 화신이라는 자각 속에서 현실적인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다. 방황하는 아이든, 미로를 헤매고 있는 사람이든, 사랑의 묘약을 통해 치유할 수 있다. 조건 없는 사랑이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는 약이라 강조하는 이유다.
차차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 보조사상연구원 기획실장 및 동국대, 금강대, 원광대, 서울대 강사를 역임했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동 대학원대 불교문예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저서로는 『법화사상론』, 『중국의 불교문화』, 『불교상식백과』(공저), 『조계종사 고중세편』(공저) 등이 있고, 『법화사상』 등의 번역서가 있다.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