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와 예수의 리더십, 그 차이와 공통점 | 불교와 리더십 4

불교와 리더십 4


붓다와 예수의 리더십, 

그 차이와 공통점


이동연 

한누리교회 담임목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무리지어 산다는 것이다. 

여기서 리더가 탄생했다. 리더는 무리의 비전을 제시하고 그 비전을 무리가 함께 달성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이 두 가지, 즉 비전 제시와 동기부여가 리더의 주요한 덕목이다. 리더가 비전은 좋은데 구성원 사이에 동기부여가 안 되면 일장춘몽이 되고 만다. 동기부여는 잘하는데 비전이 없다면 조직이 방향을 잃는다.

따라서 우선 리더는 비저너리(Visionary)가 되어야 한다.

리더가 제시하는 비전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공감을 받느냐에 따라 조직의 크기가 달라진다. 그 후 리더가 조직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동기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조직의 결집도가 달라진다. 

동기부여의 주요 요인은 인사 정책과 보상이다. 그래서 ‘인사를 만사’라고도 한다. 비전도 좋고 구성원도 탁월한데 성과가 나지 않는다면? 인사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리더에게 중요한 것은 업무 역량보다는 사람 보는 눈이다. 어떤 일에 누가 적합한지를 정확히 보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해야 한다. 이것이 안 되면 그 조직은 추락한다. 

성공한 리더들은 한결같이 인사의 귀재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사라진 후에도 조직의 비전이 지속될 수 있도록 리더십을 승계한다. 붓다에게 마하가섭과 아난다 등이 있었다면, 예수에게 바울과 베드로 등이 있었다. 이들과 더불어 차츰 예수의 비전은 서구를 덮었고, 붓다의 비전은 동양을 덮었다. 

이처럼 예수와 부처는 똑같이 불세출의 비저너리였으며, 인재 활용도 탁월했다.

당시 동서양은 험악한 지형으로 차단되다 싶이 해서 두 사상이 각자 특색 있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즉 서양은 분석적, 귀납적으로 동양은 종합적이며 연역적으로 발전해나간 것이다. 이후 성경은 카네기식 자기 개발서의 본류가 되었고, 불경은 지친 애환을 스스로 달래는 심리적 컨트롤의 원류가 되었다.  

리더로서 예수의 비전은 분명했다. 밤하늘의 북극성을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천국이라는 한 가지 지점을 가리켰다. 눈물과 고통이 없는 저 파라다이스에 나를 믿으면 갈 수 있다는 것이다(요11:25).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으면 죽어도 곧 부활할 것이라 했다. 세상이 혼돈스러울 때는 이런 강력한 방향 제시에 사람들이 매력을 느낀다.

이런 집단 심리 현상을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라고 파악했다. 위협적인 환경에서 고립된 개인이 신세계와 관계를 맺으려는 강력한 욕구가 중세기 프로테스탄티즘에 투영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지시(director)형 리더였다.

예수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중 하나가 오른편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였다. 그 강도가 살인을 했든, 역적이든 중요치 않았다,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중요했고 그 믿음 하나로 낙원에 간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여기서 피해자만이 용서할 수 있는 고유 권한이 추상적 신에게 넘어가버리고 만다.

이에 비해 붓다는 성찰(reflection)형 리더다. 유언으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을 남길 만큼, 사람들이 스스로를 등불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기를 바랐다. 이는 각자가 부처가 되라는 말과 같다. 예수와 붓다 리더십의 넘을 수 없는 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에게 ‘믿고 추종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면, 붓다에게는 네가 스스로 ‘붓다처럼 깨달은 자’가 되라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에서 예수는 화신(incarnation)이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누가 예수가 된다거나 예수 외에 다른 신성한 존재를 말한다면 모두 이단(異端)이 되고 만다. 이것이 기독교의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핵심 교리로 정착된다. 이 교리는 어두운 밤 북극성처럼 독보적이다.

그래서 『성경』에 정오선악(正誤善惡)이 분명한 것이다. 하나님과 사탄의 대표 바알세불, 천사와 마귀, 의인과 악인, 구원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 축복과 저주 등 이분법적으로 확실하게 나뉜다.  물론 그 기준은 ‘나를 믿는 자냐 아니냐’다. 『성경』에 ‘나를 믿는 자’라는 구절이 다수 나오는 이유다. 믿는 자는 우리 편이고 믿지 않는 자는 우리 편으로 데리고 와야 할 교화 대상일 뿐이다. 중간 지대란 없다. 끝까지 교화되지 않으면? ‘버림받은 자(reprobation)’로 치부해버린다.

이것이 종교개혁자 칼빈의 유명한 예정론(Predestination)이다. 

여하튼 예수는 기원의 세기, 고단한 일상을 사는 민중에게 현실 넘어 부활이라는 비전을 제시해 세기를 뛰어넘는 리더가 되었다.

예수가 서양의 비저너리였던 것처럼 붓다는 동양의 비저너리였다. 붓다의 비전 제시는 예수와 사뭇 달랐다. 예수가 북극성처럼 빛나는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제시했다면, 붓다는 시공간으로 무변광대(無邊廣大)한 연기론을 제시했다. 이를 은하수로 비유할 수 있겠다.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창백한 저 푸른 별이 우리의 고향”이라 했다. 그처럼 붓다도 삼라만상을 포함해 무한히 흐르는 은하계 전체가 하나의 인드라망이라는 것이다. 그 속의 나. 그렇게 연결된 나가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깨달음을 통해 온갖 욕망의 불이 꺼진 고요 속으로 가야 한다. 그 고요가 해탈, 곧 열반이며 저 푸르른 은하수와 나와 인류와 자연이 모두 하나 되는 길이다. 예수처럼 천국이 북극성처럼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붓다의 열반은 은하수를 흡입해가는 블랙홀 이전의 심연 없는 근원까지 받아들이는 것일 수 있다. 이로써 생멸(生滅)이 하나가 되며,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 된다. 이를 기독교의 이신칭의(以信稱義)와 대비해 이각칭불(以覺稱佛)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예수의 ‘믿음(信)’과 붓다의 ‘깨달음(覺)’에 차이가 발생한다. 믿음은 의타적(依他的)이며 깨달음은 의자적(依自的)이다. 이를 종교학에서 기독교를 타력 구원, 불교를 자력 해탈이라고 구분한다. 

어떤 가르침이 더 강력할까? 물론 타력 구원이 처음에 강한 임팩트를 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력 해탈이 더 오래간다.  

붓다와 예수가 동기부여하는 방식도 다르다. 예수는 신심의 동기부여로 ‘불을 던지러 왔다’(눅 12:49)고 선포했다. 어떤 불? 성령의 불, 물론 이기적 욕망의 불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의 불이다. 가족보다 나라보다 그 무엇보다 신앙이 더 중요하다. 

심지어 부친의 장례를 앞두고도 죽은 자는 죽은 자들이 장례 치르게 놓아두고 예수를 따르라 했다(마태 8:21~22). 여기 죽은 자는 믿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에 예수 리더십의 요체가 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세상에 없다. 그런 불신 세상을 향해 십자가 군기를 높이 쳐들고 정복해야만 한다. 여기서 중세기 200년 십자군 전쟁이 터졌다. 

근세 기독교가 서구의 제국주의적 팽창에 일조했던 것도 선교를 지상 최대 과제로 하는 신심의 발로였다. 

붓다의 동기부여 방식은 오히려 불을 끄는 것이었다. 물론 번뇌를 일으키는 탐진치(貪瞋痴)의 불을 끄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붓다의 리더십은 예수의 리더십에 비해 결집력이 약하다. 하지만 강할수록 부러지기 쉽다. 유연해야 오래간다. 

팔로어를 모으는 방식도 차이가 난다. 기독교의 선교가 얼마나 공격적인가. 이에 비해 붓다의 포교는 수동적이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십자군 전쟁이나 제국주의적 선교 방식은 예수가 본디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는 당대 유대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을 위선자로 규정했다. 그들이 겉만 깨끗할 뿐, 속에 방종과 탐욕이 가득하다며 신행일치(信行一致)를 촉구했다. 이런 예수를 유대 민중이 왕처럼 추종하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누리가 따라다니니, 권력자들이 위기의식을 느꼈다. 결국 빌라도 총독이 종교재판을 열어 정치범으로 처형했다.

인도의 초대 총리 네루는 『세계사 편력(Glimpses of world history)』에서 “예수는 기존 사회의 위선에 정면으로 맞서다가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후에 바울이 예수를 신격화했다”라고 했다.

이로써 예수가 인류의 죄를 씻어주는 구세주로 현시된 것이다. 여기서 서양의 죄책감 문화가 나왔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을 ‘신 앞에 선 단독자’라 규정했다.

서양과 달리 동양의 수치심 문화는 붓다의 가르침에 중국의 도교와 유교가 조우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붓다는 나(我)를 오온(五蘊)의 화합물로 본다. 여기서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나왔는데, 이 붓다의 가르침에 도교적 무위(無爲)사상과 유교적 입신양명(立身揚名)이 합쳐졌다. 

이로써 동양인의 무의식에 이름 석 자에 부끄럽지 않게 처신해야 한다는 명제가 깊이 깔리게 되었다. 이것이 동서양 사상의 리더인 붓다와 예수가 만들어놓은 팔로어들의 내면세계다.

예수 리더십의 현상은 결집과 축적과 상승으로 나타났다. 서양의 고딕식 건축물이 이를 상징한다. 

붓다의 리더십은 내려놓음에 있다. 내려놓고 함께 가자는 것이다. 예수의 리더십은 산업혁명 이후 승자 독식의 사회에 최적이었다. 그 후 디지털 사회가 되면서 집단 지성이 용이해졌고, 산업사회의 후유증으로 도래한 생태 중심적 가치관이 주목받고 있다. 붓다의 리더십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다. 결집과 성장이 필요할 때 예수식 리더십이, 성숙과 공생이 필요할 때 붓다형 리더십이 요구된다. 여하튼 두 성현의 리더십은 상호 보완적이다.  



이동연 서울신학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거쳐 연세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KBS』, 『BBS』, 『EBS』 등 방송 매체와 각 대학, 공무원 핵심 리더 과정 등에서 강의했고, 한기총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누리교회 담임목사 겸 작가(본명과 석산, 불도징 등 필명)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심리학으로 읽는 삼국지』, 『심리학으로 들여다본 그리스 로마 신화』, 『하루 1장 365일 붓다와 마음 공부』, 『이기는 리더십 10』, 『있는 그대로 나를 바라보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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