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사찰 속으로
울진 불영사에 가면
의상 대사와 인현왕후를
만날 수 있다
손신영
(사)한국미술사연구소 책임연구원
울진 불영사에는 여느 절에서 볼 수 없는 ‘의상전’이 있다. 독특한 이름 덕분에 의상 대사가 창건한 절이라는 점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위치는 대웅전과 탑이 자리한 중심 사역에서 벗어난 서쪽이다. 극락전과 응진전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에 이익공(二翼工) 형식으로 구성된 맞배지붕의 작고 소박한 전각이다. 내부에는 편액에 걸맞게 의상 대사 상(像)을 중심으로 좌우에 의상·원효·청허·종봉[사명 대사 유정] 스님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의상 대사가 세운 부석사나 낙산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절에서는 조사전이라 편액해 의상 대사를 기리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를 기준으로 보면, 창건주 의상 대사를 기리는 전각을 의상전이라 한 곳은 불영사가 거의 유일하다.
의상 대사는 천축[인도]의 산과 흡사한 산자락, 다섯 부처님의 그림자가 비치는 곳에 불영사를 세웠다. 하지만 10년 뒤, 마을 사람들은 불귀사로 고쳐 불렀다. 의상 대사가 불영사를 세운 후 떠나서 각화사와 부석사를 차례로 세운 다음 돌아오자, ‘우리 부처님이 돌아오셨다’며 기뻐하며 붙인 이름이다. 이렇게 의상 대사를 부처님처럼 신성시하는 내용은 『삼국유사』를 비롯해 여러 사찰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유독 불영사에서는 그 인연을 강조해 의상전을 세운 것이다.
의상전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기록을 종합해보면 조선 후기 들어서는 1611년이 가장 앞선다. 그런데 이때 세워진 건물이 현재 의상전은 아니다.
임유휴가 1630년에 작성한 「불귀사고적소지」와 김창흡이 1670년과 1708년에 불영사를 방문하고 남긴 시와 수필에는, 당시 의상전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매우 가파른 곳에 있어, 고개를 구부리면 맑고 장쾌하게 흐르는 물과 바위가 보였다”는 것이다. 이 위치는 대웅보전 뒤편, 가파른 산 정상부의 건물터로 추정된다. 오르내리기 어려운 곳에 세워 신성성은 더해졌지만, 이런 위치 때문에 참배자의 발길은 뜸하게 되었고 퇴락 이후 다시 지어지지 않아 터만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불영사 의상전 내부 |
그렇다면 현재 의상전은 언제 세워진 걸까?
2002년 10월, 현재 의상전을 해체해 수리할 때, 종도리 바닥의 홈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일반적으로 상량문에는 간단한 건물 연혁과 공사 이유, 날짜, 공사 관계자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의상전 상량문에는 건축 이력 없이, 1867년 인현왕후의 원당으로 세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17세기, 숙종대 인현왕후를 기리는 건물을 160여 년 뒤에 지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상량문을 지은 유찰 스님은 “인현왕후의 후원으로 불영사가 유지되어왔기에 추모하는 원당을 지은 것”이라 했다. 불영사에는 조선시대에 작성된 여러 기록이 전해지지만 인현왕후와의 인연은 이 상량문에만 언급되어 있다. 현재 알려져 있는 바, “인현왕후는 폐위된 후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살다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려 했는데, 불영사의 혜능 대사가 나타나 환궁하게 된다고 예언하는 꿈을 꾸었다. 이튿날 꿈속 예언이 현실화되자, 부처님 은혜에 감사하며 불영사에 땅을 하사하고 금표를 세워 보호해주었다”는 것은 모두 1930년대 기록에서 확인된다.
불영사의 영지 |
인현왕후 원당이 언제부터 의상전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제 강점기에 조선 왕실에 대한 제사를 모두 금지하자 용도가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불영사 의상전처럼, 조선 왕실의 원당이 불전으로 활용되는 양상은 가야산 해인사 진영전, 조계산 송광사 관음전, 속리산 법주사 구 조사각에서도 확인된다.
부처님처럼 신성시된 의상 대사, 꿈속의 예언에 감사하며 재보시(財寶施)했던 인현왕후, 그의 은덕을 기리고자 한 불영사. 이 이야기는 모두 세 칸 불전 의상전으로 수렴되어 있다.
손신영 대학에서 건축,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현재 (사)한국미술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이자 제주대학교 외래교수이다. 한국 전통 건축을 근간으로 불교미술을 아우르는 통섭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