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의
두 가지 이해 방식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불자라면 대부분 ‘삼계유심(三界唯心)’을 들어봤을 것이다. 우리가 6도윤회하는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 ‘3계가 모두 마음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계와 축생계, 아귀계와 수라계, 그리고 지옥과 천국이 모두 마음일 뿐 마음 바깥에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째서 3계가 모두 마음이라는 것일까? 그것은 3계가 모두 마음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한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이다. 유식에서는 이것을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고 한다. ‘오직 식(마음)만 있을 뿐 식 바깥에 경(대상)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대상인 경이 식 바깥에 따로 있지 않은 것은 그 경이 바로 식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유식에서의 ‘유식무경’은 곧 ‘일체유심조’를 뜻한다. 유식무경의 식(識)이 곧 일체유심조의 심(心)이고, 유식무경의 경(境)은 곧 일체유심조의 일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는 ‘일체유심조’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
일체유심조의 심리적 이해
‘일체를 식 또는 마음이 만든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이때의 일체를 물리적 대상 세계를 제외한 나머지 세계, 즉 저마다의 느낌이나 생각으로 채워진 각자의 심리 세계 내지 사유 세계를 뜻한다고 이해한다. 물리적 세계는 우리의 마음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실재한다고 전제해놓고 단지 그 세계의 심리적 수용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인식 차원의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물리적 세계는 우리 마음 바깥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며, 누군가 그 세계를 긍정적이고 포용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고, 누군가 그 세계를 부정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불편하고 괴로운 삶을 살게 되니, 각자가 경험하는 심리 세계, 편안한 세계 또는 불편한 세계, 행복한 세계 또는 괴로운 세계, 천국 또는 지옥은 결국 그 사람의 마음이 만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심리적 통찰도 꽤 의미 있고 중요하다. 이 통찰만으로도 삶을 힘들게 만드는 많은 불필요한 짐 내지 고통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자체가 객관적으로 그런 것이 아닌데, 내가 나의 주관적 편견과 고정관념, 나의 편협한 개념 틀과 왜곡된 인지 체계를 가지고 세계를 보기 때문에, 내가 색안경을 끼고 세계를 보기 때문에, 나 스스로 내 삶을 무겁고 힘들게 만들었구나! 여기까지만 통찰해도 삶의 과다한 무게를 어느 정도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주관적 선입견과 편견을 떨쳐버리자. 내가 낀 색안경을 벗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이렇게만 해도 외부로부터 온다고 느꼈던 불필요한 압박감을 벗어던지고 조금은 더 편안한 삶을 살게 되리라고 본다. 마음을 달리 먹음으로써 세상을 조금은 더 밝고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나와 다른 의견도 경청하고 수용할 수 있는 열린 마음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유식을 이 정도로만 이해하면, 유식을 일반적 상식 내지 일상 의식 수준에서 이해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유식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관이 바로 자연과학적 세계관, 즉 물리적인 것을 궁극적 실재로 전제하는 물리주의 내지 유물론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과학적 상식에 맞춰서 불교를 이해하다 보니, 불교의 일체유심조를 심리 세계만을 논하는 심리적 주장으로 여기는 것이다.
일체유심조의 존재론적 이해
그러나 유식은 이러한 심리적 주장보다는 훨씬 더 깊은 의미,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고 일상 의식을 전복시키는 혁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유식에서 일체를 마음 내지 식이 만든다고 할 때의 일체는 단지 우리의 심리 세계 내지 사유 세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감각하고 경험하는 대상 세계인 물리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체유심조의 심층적 이해를 물리 세계 자체의 존재를 문제 삼는다는 의미에서 일체유심조의 존재론적 이해라고 하자.
우리가 일상적으로 객관 세계라고 여기는 물리적 대상 세계가 마음이 만들었다는 말은 곧 세계는 그 세계를 감지하는 마음에 대해서만 존재하며, 그 마음 바깥에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세계는 마음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유(實有)가 아니고, 마음이 만든 가유(假有)이고 가상(假相)이라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이 경험하는 세계, 영화 <인셉션>에서 주인공이 드림머신을 타고 들어가는 세계는 그 안에 들어가서 보면 내 바깥에 그 자체로 실재하는 세계 같지만, 사실은 내 안의 정보 또는 마음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감각 대상인 물리 세계도 마음이 만든 가상 세계일 수 있는 것이다.
유식에서 마음이 만든 세계가 단지 심리 세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물리 세계까지 포함한다는 것을 우리는 『해심밀경』 「분별유가품」 중 자씨보살과 부처님이 나눈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식(唯識)’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자씨보살 : 세존이여, 모든 위빠사나 삼매에서 행해지는 영상은 그것이 마땅히 이 마음과 다르다고 말해야 합니까?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합니까?
부처님 : 마땅히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영상은 ‘오직 식일 뿐’(유식)이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식의 인식 대상(식소연 識所緣)은 오직 식이 현현한 것(식소현 識所現)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가 삼매 수행에서 우리가 현실 세계를 지각하는 듯한 뚜렷한 영상의 출현을 경험하고는 그 영상이 마음이 만든 것인지 아니면 마음 바깥의 것인지를 묻는다. 이는 마치 깊은 기도 중에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을 친견한다거나 예지몽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는 등의 상황과 흡사할 것이다. 우리도 그럴 경우 그게 정말 친견인지 아니면 그저 주관적 상상인지, 그게 정말 예지몽인지 아니면 그저 개꿈인지를 물을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고, 따라서 ‘오직 식일 뿐’(유식)이라고 답한다. 인식된 대상은 모두 식이 변현해 나타난 것이라는 말이다. 만일 대화가 여기서 그친다면, 별로 놀라운 것이 없을 것이다. 삼매에서 본 것은 그냥 주관적 마음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이 이어지는 대화에서 놀랍게도 반전이 일어난다.
자씨보살 : 세존이여, 유정이 자성에 머무르면서 색 등을 반연하는 마음에서 행해지는 영상은 그것 또한 이 마음과 다름이 없습니까?
부처님 : 선남자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범부가 전도된 생각으로 그 영상에 대해 오직 식일 뿐임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고 전도된 견해를 갖는 것입니다.
삼매가 아닌 우리의 일상 의식, 즉 대상을 따라 일어나는 반연심에서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면서 갖는 영상, 사물의 색이나 형태 등은 어떤 것인지, 그것도 마음이 만든 것인지 아니면 마음 밖 실재인지를 묻고, 부처님은 이에 대해 그것 또한 ‘오직 식일 뿐’이라고 답한다. 오직 식일 뿐인데, 어리석은 범부가 허망한 견해인 망견(妄見)에 빠져서 그것을 마음 바깥의 실재라고 잘못 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범부의 일반적 생각, 즉 물리적 세계는 그 자체 객관적으로 마음 바깥에 실재한다는 생각을 유식은 어리석은 망견, 전도된 견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삼매에서의 영상뿐 아니라 일상에서 우리가 사물 자체의 색이나 형태라고 간주하는 그런 영상들 또한 사실은 모두 마음이 만든 영상이고 마음 밖의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곧 천국과 지옥뿐 아니라 우리가 감각하고 경험하는 물리 세계, 이 구체적인 현실 세계 또한 마음이 만든 영상임을 뜻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물리 세계를 실재라고 여기는 것은 마치 꿈속에서 꿈의 세계를 실재라고 여기는 것처럼 인생의 긴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하는 허망한 생각, 망견이다. 이처럼 유식은 느낌이나 생각 등의 심리 세계뿐 아니라 물리 세계도 모두 마음이 만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리 세계는 기본적으로 나의 몸과 내 몸이 감각하는 대상 세계다. 유식은 몸을 눈・코・귀・입・몸, 즉 안・이・비・설・신 5근(根)을 가진 몸, ‘근을 가진 몸’이란 의미에서 ‘유근신(有根身)’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대상 세계를 그 근에 상응하는 색깔・소리・향기・맛・촉감, 즉 색・성・향・미・촉 5경(境)의 세계로 중생이 거기 의거해서 사는 ‘그릇으로서의 세계’라는 의미에서 ‘기세간(器世間)’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소위 객관적 물리 세계라고 여기는 것은 유식의 개념으로 말하면 바로 각자의 몸인 유근신과 그 유근신들이 의거해 사는 하나의 공통의 세계인 기세간이다.
어리석은 범부들은 대개 내 몸(유근신)과 내 몸이 감각하는 대상 세계(기세간)를 우리 마음 바깥에 그 자체로 실재하는 객관적 실유라고 여기지만, 유식은 그것들이 모두 마음이 만든 것, 따라서 ‘오직 식일 뿐’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때의 마음은 우리의 일상 의식인 제6의식일 수가 없다. 제6의식은 제6근인 의(意, manas)의 자아식(제7말나식)이 일으키는 식인데, 말나식은 유근신과 기세간을 실유로 간주해 전자를 자아(주관)로, 후자를 세계(객관)로 집착하는 아집과 법집의 식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이러한 주객 분별에 입각해 자기 밖의 세계를 객관 대상으로 반연하는 대상 의식이다. 반면 일체유심조의 마음은 이러한 제6의식에는 가려져 있는 마음, 따라서 어리석은 범부는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마음, 그래서 그 마음의 활동을 없는 것처럼 간과하는 심층 마음이다. 유식은 그 심층 마음을 제8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부른다.
물리 세계인 유근신과 기세간은 우리의 표층식인 제6의식의 관점, 어리석은 범부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마음 바깥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 표층 의식보다 더 깊이 활동하는 제8아뢰야식의 관점, 수행을 통해 아집과 법집을 버린 붓다의 관점에서 보면 유근신과 기세간은 바로 우리의 심층 마음인 제8아뢰야식이 만든 가유이고 가상이다. 바로 이 제8아뢰야식에 입각해서 ‘일체유심조’ 내지 ‘유식무경’이 성립한다. 결국 ‘일체유심조’의 정확한 의미는 우리의 마음이 반연심인 제6의식이나 아집의 제7말나식으로 끝이 아니고 그보다 더 깊이에서 활동하는 제8아뢰야식이 있다는 것을 통해서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이 아뢰야식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서양 철학(칸트)을,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불교철학(유식)을 공부했다. 현재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칸트와 초월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 『유식무경: 유식 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불교철학과 현대 윤리의 만남』, 『대승기신론 강해』, 『심층마음의 연구』, 『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나는가』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철학의 원리로서의 자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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