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과 욕구의 경계|인욕, 참는다는 것의 의미

탐욕과 욕구의 경계

원빈 스님
송덕사 주지, 행복문화연구소 소장


분쟁의 뿌리, 소유와 탐욕의 갈등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 전쟁이 종식되지 않은 상황이고, 세계 각지에서는 국지전이 진행 중이며, 강대국의 패권 다툼 속에서 대부분의 국가는 영향을 받고 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간 사회는 늘 분쟁과 갈등 속에 있었다. 개인 간의 다툼부터 국가 간의 전쟁까지, 분노는 끊임없이 표출되고 있다. 특히 현대 한국 사회는 ‘혐오 사회’로 불릴 만큼 분노가 만연해 있다. 이 사회적 분노를 해결하려면 단순히 숨기거나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의 뿌리를 찾아야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다.
개인과 국가에 이르는 모든 분쟁의 원인은 대부분 소유해 얻는 이익과 탐욕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누구나 소유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이다. 소유가 분쟁의 원인이 아닌 행복으로 승화될 수 있을까?

분노의 원인, 갈애(渴愛)
중생은 자주 분노하는 성향이 있는데, 이를 다스리지 못하면 개인과 사회 모두 고통 속에 빠지게 된다. 보통 이때 사람들은 ‘남 탓’을 하며 분노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지만, 사실 분노의 유일한 근원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갈애’이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마하박가』, 『율장대품』 Vin I 중의 Mv)

부처님께서는 ‘고집성제(苦集聖諦)’에서 모든 고통의 원인을 갈애라고 밝히셨다. 본질적으로 우리의 불안과 분노는 탐욕에서 비롯되며, 이를 이해하고 다스릴 때 개인은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고, 사회는 분쟁을 멈출 수 있다.

올바른 욕구는 삶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취 수단을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분석 경』 SN51:20)

불교에서 ‘무소유’라는 개념은 종종 오해받곤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탐욕을 경계하셨지만, 욕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욕구의 필요성을 강조하셨으며, 이를 ‘사여의족(四如意足,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네 가지 성취 수단)’ 중 ‘욕여의족(欲如意足)’이라고 설명하셨다. 이는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비결로서, 올바른 욕구는 삶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 된다.

욕구가 없다면 노력도 없다. 무기력해지고 심각한 경우 우울증에 빠진다. 자연히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어려워진다. 탐욕은 지양해야 하지만 욕구는 꼭 필요한 마음 작용이다. 불자들의 활기찬 사회생활과 적극적 수행 생활을 위해서는 이 마음가짐을 주목해야 한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그는 식의 무기력함보다는 욕구가 탐욕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탐욕과 욕구의 구별과 책임
탐욕은 쉽게 말해 ‘도둑놈 심보’이다. 이는 인과율에 어긋나는 불공정한 욕구이며, 인과의 지혜가 부족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욕구를 탐욕으로 변질시키기 쉽다. 일하면서 매일 10만 원을 버는 사람이 3만 원에 해당하는 식사를 원한다면 이는 정당한 욕구이다. 원하는 것을 누리기 위해 스스로 책임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땀 흘려 일하지 않는 사람이 타인의 돈으로 매일 3만 원에 해당하는 식사를 원한다면, 이는 부당한 행위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팔아서 돈을 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시간은 수명이고 생명이다. 자신이 벌지 않은 돈을 부당하게 쓰는 것은 타인의 수명을 빼앗는 것과 같다. 인과를 모르는 욕구는 탐욕일 뿐이니 원하는 것을 누리고 싶다면 그에 합당하는 행위로 책임져야 한다.
모든 중생은 각자의 욕구를 품고 살아간다. 그러나 인과율을 무시하는 도둑놈 심보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욕구와 부딪히게 된다. 그러면 상호 반감이 생기고 짜증이 일어난다. 해결하지 못하면 분노가 폭발해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 반감과 짜증, 분노와 해악 그리고 혐오와 원한까지의 모든 분노 계열의 감정의 뿌리에는 탐욕이 자리 잡고 있다.

탐욕과 욕구 - 번뇌를 넘어 지혜로 나아가는 길
사바세계에서 사람들은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중 역경을 더 많이 만난다. 역경과 순경을 만날 때 이것을 대하는 감정을 살펴본다면 탐욕과 욕구를 구분할 수 있다. 탐욕은 역경을 만났을 때 분노를 일으킨다. 반면 욕구는 역경에도 분노를 일으키지 않다.
앞서 살펴본 ‘고집성제’를 기준으로 보면 고통의 원인은 뜻대로 되지 않는 대상이 아니다. 그 대상을 마음대로 하고 싶은 갈애 때문이다. 건강한 욕구를 가진 사람은 이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기에 남 탓하고 분노하며 에너지를 낭비하기보다는 지혜를 발휘해 실패를 분석하고 적절한 대응을 하기 위해 전념한다. 독화살을 맞았을 때 독화살을 쏜 범인, 즉 역경의 원인을 쫓는 사람과 독화살을 뽑고 치료하는, 즉 역경으로부터 오는 갈애를 다스리는 데 전념하는 사람, 둘 중 누가 더 생존 확률이 높을까?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순경에도 감정의 차이가 있다. 탐욕으로 대상을 성취했을 때는 잠깐의 만족감 이후 기쁨이 사라지는 반면, 욕구로 대상을 성취했을 때는 그 기쁨이 오랫동안 지속된다. 예를 들면 한 청년이 자전거를 가지고 싶었다. 만약 친구의 자전거에 대한 질투로 인한 탐욕이었다면 가지는 순간 잠깐 기쁘겠지만 금방 시들해져서 애물단지가 될 수 있다. 반면 자전거를 진정으로 원했고 가지기 위해 100시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대가를 치르고 구매했다면 어떨까? 탈 때마다 만족하고 깨끗하게 닦아주면서 그 즐거움이 유지될 것이다.

“욕망은 채울 수 없다. 바닷물로 목을 축이려는 것과 같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은 더욱 심해질 뿐이다.” (『법구경』)

탐욕이 아닌 욕구를 지혜롭게 활용한다면 바닷물에서 소금기를 뺀 청정수를 마실 수 있기에 역경에는 분노하지 않을 것이요, 순경에는 지속되는 환희심을 누릴 수 있다.

만족스러운 소유를 위한 마음가짐
부처님께서는 출가 수행자들에게 삼의일발(三衣一鉢)이라는 적은 소유물로 만족하며 살 것을 강조하셨다. 하지만 재가 불자들에게는 도덕적으로 어긋나지 않고 정당한 방법을 취했다면 부를 누리는 것을 허락하셨다. 분쟁이라는 것은 많은 소유물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비구 스님끼리 발우 하나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고 반면, 많은 부를 누리는 장자끼리 큰 재산을 양보하는 경우도 있었다. ‘무소유’는 단순히 물질적인 문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물에 대한 정신적 집착의 문제이다.
불자들은 흔히 ‘무엇을 얼마나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물질의 종류와 양이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으로 소유할 것인가?’이다. 물질을 대하는 바른 마음가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과를 책임지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원칙이다. 스스로 인과에 어긋나지 않는 대가를 치른다면 그 소유는 정당하다.
둘째, 본분사에 어울리는 소유를 해야 한다. 내적으로는 일대사 인연으로 나아가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소유해야 하는 것이고, 외적으로는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 소유를 해야 한다. 재가 불자의 경우 오계를 기준으로 삼고, 출가자의 경우 구족계와 승단의 율을 기준으로 삼아 소유하는 것이 본분사에 어울린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법정 스님)

가지고 싶은 목록을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 필요한 것’으로 구분한다면, 탐욕으로부터 마음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 ‘원하는 것’은 대부분 소금물처럼 마실수록 더 목이 마르듯이 가지고 나도 다른 것을 더 원하게 된다. 반면 ‘필요한 것’은 결핍될 때 궁색해지고 심각하면 생존을 보장받지 못한다. 지속적인 즐거움은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니, 활기찬 삶을 원한다면 이 솔직한 욕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구분하는 방법은 앞서 언급했던 기쁨이라는 감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만약 물건을 샀는데 살 때만 기쁘고 금방 무덤덤해진다면? ‘원하는 것’, 즉 탐욕이었던 것이다. 반대로 기꺼이 대가를 치르고 볼 때마다 기쁘고 만족이 지속된다면? 이것은 ‘좋아하는 것’, 즉 건강한 욕구이다. 이 기쁨을 지표로 삼아 탐욕의 대상은 가지고 싶은 항목에서 삭제하고, 좋아하는 대상은 정당하게 소유해 즐거움을 누린다면 분쟁 없이 만족스러운 생활이 될 것이다.
분노는 탐욕에서 비롯된다. 탐욕은 인과에 어리석은 욕망이며 이를 내려놓지 않으면 분노와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욕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올바른 욕구는 삶의 원동력이 되며, 이를 통해 개인과 사회는 조화를 이루며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자는 인과의 지혜에 대한 가르침을 배워 탐욕과 욕구를 구분하고 인과율에 적절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 갈애가 옅어진 소유물은 수행자의 일상 속 즐거움과 행복의 원천이 될 것이고, 본분사인 열반으로 나아가는 조력이 될 것이다.


원빈 스님|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행복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경남 산청에 있는 송덕사의 주지를 맡고 있다. 저서에 『원빈 스님의 금강경에 물들다』, 『굿바이, 분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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