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바람 불거든 오거라, 청송 주왕암 나한전|문화재의 시선으로 보는 절집 이야기

하얀 바람 불거든 오거라

청송 주왕암 나한전


크게 숨을 쉬어봐
- 맑은 공기로 샤워하는 산소 카페 청송 주왕산
“이번이 마지막이야. 정말 마지막이야.” 그녀가 혼자 되뇌며 주왕산에 들어섰다. 환갑 생일이 어제였다.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스스로도 인정한 60년 생이다. 그런데 그녀는 혼자 스스로를 의아해하며 주왕산에 들어서고 있다. 왜 계속 오고 싶어지는가. 왜 매번 마지막 소원이라 생각하고 기도하건만 또 기도할 일이 생기는 건가.

10년 전 등산 모임 사람들과 청송 주왕산을 찾아온 그때 이후, 그녀는 겨울이면 혼자 이곳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걷기 좋은 봄, 여름, 가을 다 놔두고 하필이면 겨울이다. 나는 그런 그녀를 어느새 기다리고 있다. 매번 마지막이라고 되뇌며 나를 찾아오는 길, 주왕산 주산지 호수에 다다르면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켠다. 하-맑은 공기!

주왕산 주산지는 1721년 조성된 인공 연못이다. 극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른 적 없다. 물속에 반쯤 잠긴 왕버들 나무들이 신비한 비경을 뽐내는 주왕산의 겨울. 그녀는 이 계절이 가장 맑은 공기로 가득 찬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엉치뼈 안에 숨긴 ‘주왕의 전설’과 ‘불법의 불씨’
– 주왕암
청송 주왕산은 722m 정도밖에 되지 않는 낮은 산이지만 바위가 많아 설악산과 월출산, 그리고 주왕산은 우리나라 3대 암산(巖山)으로 불린다.

중국 당나라 때에 동진의 왕이었던 ‘주왕(周王)’이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에 쳐들어갔다가 크게 패하자 신라까지 쫓겨왔는데, 주왕이 숨어든 곳이 바로 지금의 주왕산(옛 석병산)이었다. 당나라 왕은 신라에 주왕을 잡아달라 청했고, 신라 장군 마일성의 추적 끝에 주왕은 최후를 맞는다.

그런데 남의 나라 왕, 그것도 패배해 죽음에 이른 왕의 이름을 왜 산 이름에도, 암자 이름에도 남긴 것일까? 내 짐작에는 구전을 통해 사람들이 믿는 그 말 때문일 것이다.

“주왕이 이곳에 불법의 씨앗을 심고 죽었으니,
주왕암에서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준다더라”
주왕은 주왕굴에서 불도를 닦으며 수행했고,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통일신라 사람들은 주왕암을 지었다.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을 위해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 스님은 대전사를 지었다. 주왕의 딸 백련 공주가 성불한 곳은 연화굴로 불리며, 그녀의 이름을 따 ‘대전사 백련암’이 지어졌다. 주왕의 수행은 자식들의 깨달음으로 이어졌고, 천년 세월 수많은 이들이 소원을 빌고 감사를 표하러 찾아오니, 전설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한 번 경험하면 끊을 수 없는 기도처
- 주왕산 주왕암 나한전
주왕암은 주왕산에서도 심심산중에 있건만, 그녀는 환갑의 몸을 이끌고 굳이 인적이 드문 겨울에 나에게 온다. 내 품에 신발을 벗고 들어와 외투를 벗어놓고 좌복을 깐다. 그렇다. 나는 주왕암의 주불전인 나한전 전각이다. 익살스러운 표정조차 아름다운 석가모니 삼존불과 200년 넘은 후불탱화(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70호), 그리고 좌우로 16나한상이 그녀를 맞는다. 오는 길이 고되었을 텐데 그녀는 힘든 기색도 없이 냅다 108배를 한다. 그리고 가부좌로 앉아 가쁜 숨을 고르며 바라보는 곳은 16나한이다.


신통 복전(福田) 주왕암 나한전 16나한
- “소원을 말해봐”
똑같은 모습 하나도 없는 열여섯의 아라한들은 소탈하고 편안한 눈웃음으로 말을 걸어온다. “이번엔 고민이 뭐야? 괜찮아. 소원을 말해봐.” 그녀는 그 나한들을 찬찬히 바라본다. 배시시 웃더니 자분자분 나지막이 기도를 하기 시작하는 그녀. 나는 단지 나한전 전각일 뿐이지만, 16나한에게 기도하기 위해 찾아온 이들이 그들과 교감하는 이 순간이 참 기분 좋다.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하시기 전에 숙제를 받은 16나한은 부처님의 제자들 중 가장 출중한 신통력을 자랑하는 분들이었다. ‘다음 부처인 미륵여래가 올 때까지 열반에 들지 말고 정법과 대중을 보호하라. 모든 중생의 복전이 되어 소원을 들어주어라.’ 그 숙제를 이행하느라 전 우주에 걸쳐 신통력으로 현세에 함께하고 있는 나한들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소원을 빌러 온 그녀는 몇 시간 마음껏 기도를 하다가 겨울 추위도 잊은 채 길을 나선다.


홀로 산길을 내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미소가 느껴진다.
내년 겨울에도 그녀는 내 품에 들어올 것이다.
나한전과 나한, 그리고 그녀. 서로에게 아름다운 중독이 되었으니.
하얀 바람 불거든 다시 만나자, 친구.


글|정진희
방송작가, KBS <다큐온>, <다큐공감>, <체인지업 도시탈출>, EBS <요리비전>, <하나뿐인 지구>, <희망풍경>, MBC <다큐프라임>, JTBC <다큐플러스> 등에서 일했고, 책 『대한민국 동네 빵집의 비밀』을 출간했다.

사진|마인드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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