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소설 속에 담긴 치유와 깨달음
-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며
한강의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함께 읽기
정여울 작가
끝내 무너지지 않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한강 작가의 작품들
“내 피부와 힘줄과 뼈가 마르게 하소서, 그리고 내 몸의 모든 살과 피도 함께 마르게 하소서! 나는 그것을 환영하리라! 그러나 나는 궁극의 최종적인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결코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열반경』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자기 자신의 깨달음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그렇게 보리수나무 아래서 수행을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부처님을 생각하면, 누구든 종교를 뛰어넘어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한강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내 작품의 주인공들이 마침내 상처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여기서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겠다’고 결심한 듯한 작가의 단호한 결심이 느껴지곤 한다. 한강 작가의 작품은 상처 입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단지 피해 자의 고통이나 치유를 향한 결심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깊이 아파본 자만의 존엄과 품격을 보여준다. 한강의 주인공들은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 우리를 눈물겹게 한다.
한강 지음, 창비 刊, 2022 |
◦ 단단해진 자신의 세계를 지키려 끝까지 분투하는 주인공의 눈물겨운 투쟁,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린 영혜가 집에서 기르던 개에 물렸는데, 아버지는 그개를 영혜가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죽였던 것이다. 그것은 무시 무시한 처형이기도 했고, 끔찍한 상실이기도 했으며, 나를 보호해야 할 사람이 나를 공격할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영혜는 까닭 모를 악몽에 시달리 고, 그러면서 점점 육식을 멀리하게 된다. 아버지가 개를 죽인 것은 개를 먹기 위한 행위이기도 했기에, 영혜는 ‘육식’ 자체에 내재한 폭력의 트라우마가 자신의 인생을 좀먹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 다. 영혜의 ‘채식’은 주변의 인간관계 모두를 무너뜨린다. 타인의 시선을 너무 많이 신경 써야 하는 한국 사회에서, 영혜의 채식은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마치 육식이 ‘정상적인 삶’의 척도라도 되는 듯, 수많은 사람들은 영혜의 채식을 은근히 비하하고 따돌린다. 급기야 아버지는 영혜의 입에 억지로 탕수육을 구겨 넣으려 하고, 영혜는 절대로 먹지 않겠다며 온 힘을 다해 저항한다. 영혜의 저항은 사실 ‘나를 내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모든 권력’을 향한 저항이 아니었을까. 육식에도 집착하지 않고, 남편이나 다른 인간관계에게도 집착하지 않고,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구속되고 싶지 않은 영혜의 해맑은 영혼. 트라우마 이후 오히려 단단해진 자신의 세계를 지키려 끝까지 분투하는 영혜의 눈물겨운 투쟁이 가슴을 울린다.
한강 지음, 창비 刊, 2014 |
◦ ‘역사의 트라우마’에 맞서는 작가 한강의 투쟁을 그린 명실상부한 대표작, 『소년이 온다』
『소년이 온다』는 ‘역사의 트라우마’에 맞서는 작가 한강의 투쟁을 그리는 명실상부한 대표작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어리고, 연약하고, 아무런 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80년 광주’의 시민군이 되기 전에는 그저 평범한 학생들이자 청년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1980년 광주에 계엄령이 내리고 군대가 민간인을 학살하는 참혹한 장면을 목격한 뒤, 그들은 끝까지 서로를 위해, 사람다움을 위해,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존엄을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도청에 남기로 한다. 『소년이 온다』는 그렇게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수많은 시민군 중에서 열다섯 살소년 동호가 어떻게 그 거대한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받아들이고, 마침내 끌어안는지를 보여준다. 그 잔인한 5월, 동호는 세상을 떠났지만 동호를 기억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결코 아무도 동생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부디 동생의 이야기를 제대로 써달라고 부탁하는 동호 형의 간절하고도 단호한 부탁은 『소년이 온다』를 통해 비로소 이루어졌다.
한강 지음, 문학동네 刊, 2021 |
◦ ‘지금 여기서 트라우마를 견뎌내는 사람들’의 이야기,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죽음이 끝’이라고 믿는 현대인의 차가운 시선을 아름답게 전복한다. 제주 4.3사건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역사적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소년이 온다』와는 다르게 ‘그때 그시절의 트라우마’보다는 ‘지금 여기서 그 트라우마를 견뎌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동네 사람들이 거의 몰살당하다시피한 곳에서 살아남은 엄마의 이야기,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른 채참혹하게 죽어가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 로든 간절히 기억하고, 복원하려 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독자들의 마음을 울린다. 그저 친구의 안부가 걱정되어 떠났던 한 번의 여행길이 목숨을 건 투쟁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그 투쟁 속에서 결국 발견하는 것은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결코 작별하지 않는다’는 진실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강 작가가 도달한 곳은 단지 ‘한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쾌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인류의 마음이 있는 곳은 그 어디라도 끝내 닿고야 말겠다는 이야기꾼의 간절한 의지일 것이다.
정여울|작가. 『문학이 필요한 시간』 저자. KBS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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