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불한 일곱 왕자와 영지, 하동 칠불사|사찰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성불한 일곱 왕자와 영지
하동 칠불사

백원기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칠불사 영지
칠불사 ‘명상의 길’

불교문화와 가락국의 숨결이 숨어 있는 칠불사
가야 불교의 발상지 지리산 칠불사는 금강산 마하연선원과 더불어 한국 2대 참선 도량으로 불렸다. 또한 음택으로는 오대산 적멸보궁이 으뜸이고, 양택으로는 칠불사가 제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칠불사는 가히 최고 명당자리로 문수 신앙의 중심지이다. 신라 시대 담공선사, 고려 시대 정명선사, 조선 시대 벽송선사·서산대사·부휴대사·초의선사 등 많은 고승을 배출했다. 현대에는 용성, 금오, 서암 등의 큰스님들이 안거했다. 또한 통일신라 시대 거문고의 전승자 옥보고도 칠불사 운상원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익히고 신라 땅에 거문고의 명맥을 뿌리내렸으며, 다성 초의선사가 아자방에서 정진하는 동안 『다신전』(1828년)을 초록해 『동다송』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의 불교문화와 가락국의 숨결이 숨어 있는 칠불사는 다음과 같은 창건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맑은 연못에 성불한 일곱 왕자의 모습이 비쳤다는 영지
가락국의 김수로왕은 인도 갠지스강 상류 지방에 기원전 5세기부터 있었던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수로왕과 허황후 사이에서 열 명의 왕자가 태어났는데, 큰아들 거등은 왕위를 계승했고, 차남 석(錫) 왕자와 삼남 명(明) 왕자는 어머니 허황후의 성씨를 따라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허황후의 오빠인 장유선사가 데리고 출가를 했다. 일곱 왕자는 장유선사를 따라 합천 가야산에서 3년간 수도 정진했다. 그 후 산음(지금의 산청) 휴식재를 넘어 의령 수도산, 자굴산, 사천 와룡산과 구룡산에서 수행하다가 지리산으로 들어와 반야봉 동남의 주능선인 토끼봉 아래에서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장유선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일심으로 정진했다. 운상원은 ‘구름 위의 집’이라는 뜻으로, 칠불사 골짜기가 구름바다가 될 때 이곳이 구름 위에 드러나므로 운상원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운상원에서 일곱 왕자는 3년여간 치열하게 수행 정진했다.

속세와 인연을 끊고 세상에 나오지 않게 되자 수로왕과 허황후는 왕자들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갔다. 어느 날 왕자들을 만나기 위해 그들이 수행 중인 운상원을 찾아갔다. 하지만 장유선사는 “출가득도를 하려는 왕자들의 수행에 방해가 되니 돌아가세요”라며 만나지 못하게 하고 돌려보냈다. 그 후에도 허황후는 일곱 왕자가 너무나 보고 싶고 그리워서 여러 번 운상원을 찾아갔으나 장유선사는 전혀 허용하지 않았다.

여러 날을 선원 밖에서 안타깝게 기다리던 허황후는 참다못해 아들들의 음성만이라도 듣고 싶어 아들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그러자 “어머니, 저희들은 속인을 대할 수 없으니 돌아가세요”라는 음성만 들렸다. 상심한 허황후는 장유선사에게 아들들의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싶다고 간청했다. 이에 장유선사는 “왕자들은 이미 출가해 수도하는 몸이라 결코 상면할 수 없습니다. 꼭 보고 싶으면 절 밑에 연못을 만들면 왕자들의 모습이 보일 겁니다”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왕과 황후는 절 아래 조그만 둥근 연못을 만들고 물에 비치는 자식들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 있길 소망하고 그들의 성불을 기원했다. 얼마 후 “어머니, 선원 앞 연못을 보면 저희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황후가 연못 주변을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아들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달 밝은 어느 날 밤 드디어 왕자들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다시 칠불사를 찾은 황후를 장유선사는 반가이 맞으며 아들들이 성불했으니 만나라고 했다. 허황후가 발길을 돌리려다 연못 속을 들여다보니 과연 일곱 왕자가 합장하고 있는 모습의 그림자가 연못에 나타났다. 맑은 연못에 성불한 일곱 왕자, 즉 광불, 당불, 상불, 행불, 향불, 성불, 공불 등 생불이 각각 황금 가사를 걸치고 공중으로 올라가고 있는 모습이 완연히 비쳤다. 그 모습에 감동한 것도 잠깐, 한번 사라진 일곱 왕자의 성불한 모습은 그 뒤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그 연못을 영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후 김수로왕은 일곱 왕자의 성불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이곳에 큰 절을 짓고 일곱 부처가 탄생한 곳이라고 해 절 이름을 ‘칠불사(七佛寺)’라 명명했다고 한다. 칠불사 인근의 범왕(凡王)마을은 수로왕이 일곱 왕자를 만나기 위해 임시 궁궐을 짓고 머물렀다고 해서 붙여졌고, 화개면 정금리의 대비마을(大妃洞)은 허황후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머물렀다 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칠불사 입구에 이르면 ‘영지’라는 둥근 연못이 고요한 지리산 반야봉을 담고 있다. 지금은 비단잉어들이 유영하고 있다.

칠불사 ‘아자방(亞字房)’

칠불괘불탱화 비롯해 아자방, 옥보대, 거문고와 다도에 이르기까지
볼거리, 이야깃거리 넘쳐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괘불은 삼신불, 영산회상, 석가삼존불 등 다양한 소재로 모신 것들이 대부분인데, 최근 칠불사에 조성된 ‘칠불괘불탱화’는 김수로왕의 성불한 일곱 왕자를 중심으로 한 가야 불교의 설화가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칠불’을 중심으로 상단 우측에는 김수로왕과 허황후, 장유선사가 있고, 좌측에는 가락국 제2대 왕인 거등 태자와 허씨 성을 이은 두 왕자를 묘사했다. 네 모서리에는 사방천왕이 불토를 외호하고 있으며, 중앙 아래로 용왕과 용녀를 배치해 장엄함을 더했다.

한편 세계 유일의 온돌 구조로 만들어진 칠불사의 ‘아자방(亞字房)’은 금관가야에서 온 구들도사 담공선사가 선방인 벽안당에 ‘아(亞)’ 자 모양으로 놓은 구들로 불을 한 번 때면 49일간 따뜻했다는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옆에 있는 굴뚝을 입 구(口) 자로 보면 벙어리 아(啞) 자가 되는데, 이곳은 처음부터 벙어리처럼 말을 하지 못하는 침묵의 방 수행처로 만들어졌다. 이곳은 한 달 반간 그 온기가 지속되었다고 해 신비한 방으로 널리 당나라까지 알려져 있었고, 그 온돌의 특이성으로 ‘세계건축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다.

일곱 왕자가 수행하고 성불한 곳은 ‘옥보대’다. 현재 스님들이 수행하는 운상선원 또는 대웅전 뒤편 숲길 사이에 평상이 있는 100여 평 남짓 평평한 자리가 옥보대의 유력한 후보지다. 장유선사가 일곱 왕자를 데리고 와서 공부를 시킨 곳이라고 해서 후대 사람들이 ‘보옥’이라는 이름의 앞뒤를 바꿔 옥보대라고 했다는 주장이 있다. 신라 시대 거문고 전승자인 옥보고가 이곳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연구했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옥보대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칠불사 일주문을 지나는 길 가장자리엔 숲길을 따라 조성한 ‘명상의 길’이 눈길을 끈다. ‘치유’란 마음의 병을 회복시켜 정상적으로 돌려놓는 작업이라 할 때, 우리의 감성을 건드리는 설화와 명상의 숲길은 자아성찰을 통한 상실과 불안을 치유하고 내려놓고 견디며 살아가는 지혜를 제공할 것이다. 그 치유의 힘을 칠불사 창건 설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亞름茶雲’ 절, 칠불사는 창건 설화와 영지, 거문고에 얽힌 이야기, 다도의 중흥지, 세계 건축사에서도 보기 힘든 아자방(亞字房) 등에 대해서는 스님들 사이에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일곱 왕자를 성불시킨 장유선사는 거문고의 명인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불교음악 범패가 쌍계사에서 태동했지만 실상 범패의 기원을 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신라 경덕왕 때는 옥보고가 이곳에 입산해 50년간 거문고 곡 30곡을 지었다. 그 비법을 제자 명득에게 전했고 명득은 귀금에게 전수했다. 서산대사가 좌선하고 순조 28년(1828) 대은선사가 율종을 수립했다. 칠불사 아자방은 많은 전설도 남기고 있다. ‘목마 탄 사미승’ 이야기가 그 대표적이다.

조선 중기 때의 이야기다. 새로 부임한 하동군수가 쌍계사로 초도순시 차 왔다가 그 말사인 칠불사에 있는 아자방 선원이 보고 싶었다. 외인의 출입을 금했지만 군수는 억지로 선방문을 열게 했다. 늦봄이기 때문인지 점심 공양을 마친 스님들은 혹은 천장을 쳐다보며, 혹은 고개를 떨구고, 혹은 좌우로 흔들거리며, 혹은 방귀를 뀌면서 졸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돌아온 군수는 이들을 혼내줄 심산으로 ‘목마를 타고 동헌 마당을 돌면 후한 상을 내리고 그렇지 않으면 큰 벌을 준다’면서 쌍계사에 통문을 띄웠다. 통문을 받은 쌍계사에서는 대책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묘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한 사미승이 자신이 이 일을 맡겠다며 다른 스님들에게 목마 만들어주기를 부탁했다. 스님들이 만들어준 목마를 메고 하동 관아로 간 사미승은 자신이 그것을 타고 동헌을 돌아보겠다고 군수에게 이야기했다. 군수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자신이 아자방에서 본 것을 사미승에게 이야기했고 거기에 따라 사미승은 답변했다. “칠불암에 도인이 많다더니 내가 저번에 가보니 참선한다는 중이 모두 졸기만 하더구나.” “도인이라고 해서 특별한 사람은 아니지요.” “천장을 쳐다보며 졸고 있는 것이 무슨 공부란 말이냐?” “앙천성수관(仰天星宿觀)이지요. 하늘을 우러러보며 별을 관찰하는 공부로 상통천문(上通天文)해야 중생을 제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땅을 보며 조는 자는?” “지하망명관(地下亡命觀)이지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게 되는데 그들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몸을 좌우로 흔들며 조는 것은 무엇이란 말이냐?” “춘풍양류관(春風楊柳觀)이지요. 있음과 없음에 집착해도 안 되며 전후좌우 어느 것에도 얽매어서는 안 된다는 달관의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귀는?” “타파칠통관(打破漆桶觀)이지요. 군수같이 우매한 칠통배들을 깨닫게 하는 공부입니다.” 말을 마치고 사미승은 목마를 타고 동헌 마당을 한 바퀴 빙 돌더니 공중으로 사라져버렸다.


백원기|동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평생교육원장을 맡고 있다. 『불교설화와 마음치유』,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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