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 가지 않는
여여부동한 이것!
법상 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모든 것은 왔다 가는데 오고 감에 흔적 없이 여여한 이것은 무엇일까?
새소리가 짹짹하고 들리더니 이내 사라진다. 하나의 생각도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한 사람이 문을 노크하고 들어와 묻고는 답을 듣고 나간다. 전화벨 너머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는 끊는다.
모든 것들은 이렇게 왔다가 간다. 돈도 왔다가 가고, 명예도 왔다가 가고, 기쁨도 왔다가 가고, 슬픔도 왔다가 간다. 기쁜 일이 올 때 행복한 감정도 왔다가 이내 사라지며, 슬픈 일이 있을 때 슬픈 감정도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저절로 사라진다. 성공도 왔다가 가고, 실패도 왔다가 가고, 괴로움도 왔다가 가며, 나라는 존재 또한 이와 같이 왔다가 간다.
삶 또한 그렇게 왔다가 간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왔다가 간다는 사실은 어디에서 일어났는가? 누가 알았는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갔는가? 무수히 많은 것들이 왔다가 갔다는 사실을 아는 그것은 왔다가 간 것일까? 그것은 정말 무엇인가?
‘순수의식? 텅 빈 배경? 공(空)? 참나? 불성? 자성? 본래면목?’
이런 말로 이것을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모양도 없지만,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그 모든 것들의 바탕, 근원 같은 무언가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있다.
무엇이 오더라도 붙잡지 않고, 무엇이 가더라도 싫어하지 않으며, 오고 감에 흔적 없이 여여한 이것은 무엇일까?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이 둘이 아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소리가 왔다가 간다. 보통 우리는 귀로 소리를 들을 때, 듣는 내가 따로 있고, 들리는 소리가 따로 있어서, 내가 소리를 듣는다고 분별한다. 그러나 들리는 소리를 떠나 듣는 내가 있을 수 없고, 듣는 나를 떠나 들리는 소리가 있을 수 없다. 그 둘은 연기적으로 동시생 동시멸, 인연생 인연멸로 서로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본래 듣는 나도, 들리는 소리도 따로 없지만, 인연가합(因緣假合)으로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본래 없는 것, 즉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한 것을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이라는 인연을 화합시킴으로써 ‘있는 것’이라는 착각을 일으킨다.
이렇듯 육근과 육경이 화합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실체적으로 있다고 여기며 육경에 휘둘리고 끌려다니는 상태를 육근이 오염되었다고 하고, 이를 인연생 인연멸임을 바로 보아 그 어떤 육경이라는 경계에도 끌려가지 않는 상태를 육근이 청정하다고 한다. 스님들이 축원할 때, 육근청정을 발원하는 것 또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중생은 육근이 오염되어 있기에, 외부 대상인 육경이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착각하기에, 외부 경계에 집착하고, 휘둘리면서 취사간택하는 것이다. 좋은 것은 집착해 취하고 싶은데 취해지지 않을 때 괴롭고, 싫은 것은 거부하고 싶지만 거부되지 않을 때도 괴롭다. 육근 육경의 연기 작용을 모르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믿을 수 없겠지만, 나와 세계는 이처럼 인연 따라 생겨난다. 내가 따로 있고, 내 바깥에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있으므로 세계가 있고, 세계가 있으므로 내가 있을 뿐이다. 즉 나와 세계는 서로에게 기대어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기에, 그 둘은 사실 둘이 아니다. 나와 세계가 둘이 아니다.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이 둘이 아니다. 불이법(不二法)이 존재의 실상이다. 오직 있는 것은, 있고 없고의 너머에 있는 이 하나뿐이다!
짝(죽비 소리)! 이것이 바로 이것이다.
보는 것을 통해 확인되는 이것
눈앞에 무언가가 보인다. 그저 볼 뿐! 그 보이는 것을 해석, 판단, 분별하지 않으면, 그저 보일 뿐이다. 이것이 저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봄, 이것 하나가 살아 있다.
좋은 것이 보이든, 나쁜 것이 보이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든, 싫어하는 것을 보든, 똥을 보든, 꽃을 보든, 사랑하는 사람을 보든, 미워하는 사람을 보든, 바다를 보든, 하늘을 보든, 볼펜을 보든, 나무 한 그루를 보든, 보이는 대상은 여러 가지로 나뉜다.
보이는 대상에 따라 우리는 곧장 해석해, 좋아하거나 싫어한다. 좋은 것은 더 보고 싶고, 싫은 것은 더 이상 보기 싫어 피한다. 그런데 무엇을 보든, ‘보이는 것’은 달라지는데, 달라지지 않는 무언가가 하나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보이는 것’은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보는 것’, ‘보고 있음’이라는 이 보고 있다는 존재감, 이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무엇을 보더라도 보이는 대상은 달라지지만, 그것을 보는 이것은 하나다.
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눈이 있어도, 금방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상은 상관없이, 그 보이는 것들을 ‘보고 있다’는 이 순수한 존재감, 있음이 있다.
보는 것을 통해 보고 ‘있음’이 확인되지 않는가? 보이는 것을 따라가면, 경계를 따라가면 보이는 것은 좋거나 나쁜 것으로 나뉜다. 그러나 사실 대상은 좋거나 싫을 수 없다. 좋고 나쁘게 보이는 것은 내 의식이 만들어낸 환영일 뿐이다.
정견(正見),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라. 식(識)으로 좋거나 나쁘게 보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해석 없이 보라! 이것은 노력이 아니다. 저절로다. 이것이 곧 위빠사나고 참된 명상이다. 위빠사나는 내가 하는 수행이 아니다. 무위법(無爲法)이며, 늘 있는 우리의 본성이다.
있는 그대로 보면, 대상은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다. 집착도 만들어내지 않고, 미움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저 그럴 뿐이다. 대상이 나타나면 볼 뿐이지만, 그것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보는 것을 통해 해탈한다.
법상 스님|동국대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공부하다가 문득 발심하여 불심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여 년 군승으로 재직했으며, 온라인 마음공부 모임 ‘목탁소리(www.moktaksori.kr)’를 이끌고 있다. 현재는 유튜브 ‘법상스님의 목탁소리’를 통해 16만 명의 구독자와 소통하고 있고, 헬로붓다TV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상주 대원정사 주지, 목탁소리 지도법사를 맡고 있으며, 저서로 『보현행원품과 마음공부』, 『육조단경과 마음공부』, 『수심결과 마음공부』, 『도표로 읽는 불교교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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