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종사
물방울 소리가
종소리로 울려 퍼진 절
종소리가 내 귀에만 들렸음은 분명 나한님들의 조화라!
수종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양수리)를 조망할 수 있는 그야말로 경치가 아름답고 빼어나 가히 선경(仙境)에 버금간다. 조선 시대 명문장가 서거정이 “동방 사찰 가운데 제일의 전망”을 간직한 절이라 격찬했을 정도로 빼어난 절경을 간직한 수종사 중창 설화에는 세조와의 깊은 관계가 있다.
세조 4년(1458년) 지병인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강원도 오대산에 갔다가 환궁하는 도중이었다. 임금의 행렬이 지금의 수종사 근방인 양수리에 도착한 것은 해거름이었다. 금강산에서 발원해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북한강과 삼척 대덕산에서 첫 물길을 일으켜 조선 땅의 허리를 씻어 온 남한강, 그 두 강의 위세가 한곳으로 모여드는 이곳에 임금의 행렬이 하룻밤을 쉬어 가고자 했다. 침상에서 곤히 잠들었던 세조는 청아한 종소리에 잠을 깼다. “참으로 좋은 종소리로다. 이 근처에 큰절이 있음이야. 그런데 어찌하여 대신들은 절이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을고?” 임금은 그 청아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감상하며 다시 잠이 들었다. “이 근처에 큰절이 있는 듯한데 어떤 절이 있더냐?” 이른 아침 임금이 기침해 물었으되 대답하는 신하는 없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근처에 절이 있는 것을 모른다면 어젯밤에 들린 종소리는 어디서 나온 것이냐?” 신하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안절부절못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하, 이곳 인근에 종소리가 들릴 만한 절은 없고 간밤에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나이다.” “내가 헛것을 들었을까. 그럴 리 없다. 분명 부처님이 어떤 계시를 내리심이로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임금은 신하들에게 강 건너 산을 조사하도록 했다.
“분명 절이 있거나 절터라도 있을 것이다. 특별히 종이나 파편이 있으면 보고하라. 어떤 기이한 형상이 있으면 손대지 말고 그대로 두도록 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아름다운 범종 소리와 같은 물방울 소리가 울려 퍼지다
한나절 만에 돌아온 군사들과 대신들은 이미 강을 건너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 임금에게 뜻밖의 소식을 가져왔다. 그 산은 운길산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산 정상 가까이에서 그리 깊지 않은 암굴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암굴 앞은 절터의 흔적이 완연하나 폐허가 되어 이렇다 할 유물이 없었다. 다만 암굴에 열여덟 분의 나한님들이 정연하게 잘 조성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신하들이 군사를 데리고 암굴 앞에 이르니 18 나한상 앞쪽의 암굴 천장에서 물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는데, 그 소리가 큰절에서 듣는 아름다운 범종 소리와 비슷하다는 보고가 있었다. “바로 그곳이다. 그 소리가 내 귀에만 들렸음이니 분명 나한님들의 조화라 할 것이다. 내 그곳에 친히 참배하지 않을 수 없으니 길을 안내하도록 하라.”
중창 불사 후 세조 손수 수종사(水鍾寺)라 이름 지어
한양 궁궐행을 하루 미루고 산 정상 가까이 위치한 암굴에 도착한 임금은 그곳에 조성된 나한님들을 보고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삼명(천안명·숙명명·누진명)과 육신통(천안통·천이통·타심통·신족통·숙명통·누진통)을 갖추어 인간과 천상인의 소원을 두루 성취시켜준다는 나한님의 위신력과 미소에 감복하며 지극정성으로 절을 올렸다.
“이곳에 절의 흔적이 있으니 지난날 절이 피폐해 나한님들이 당(堂)을 잃고 암굴에 드신 것이 안타깝도다. 아마 짐의 귀에 들린 종소리는 절을 다시 일으켜 세우라는 나한님들의 계시가 분명하니 팔도 방백들은 속히 의논해 이곳에 절을 지으라. 그리고 절 이름은 물방울 소리가 종소리로 울려 퍼진 뜻을 새겨 수종사(水鍾寺)라 함이 좋을 듯하다. 절 이름에는 나한님의 신묘한 위신력이 담겨 있음을 알고 속히 불사를 추진하도록 하라.” 참배를 마치고 암굴 앞에 서서 산 아래를 둘러본 임금은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앞에 펼쳐진 정경이 가히 조선 제일의 풍광이었다. 남한수와 북한수가 만나는 저 아래의 양수리는 한 폭의 커다란 그림과 같았다. 임금은 한나절을 암굴 앞에 서서 산세와 양수리의 풍광을 즐기다가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고 하산했다. 세조는 이곳에 절을 다시 지을 것을 명하고, 이듬해인 1459년 중창 불사가 끝나자 손수 ‘물방울 소리가 종소리로 울려 퍼진다’는 뜻을 새겨 수종사(水鍾寺)라 지었다. 임금이 심은 은행나무는 쑥쑥 자라났고 중창된 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를 했다.
수종사는 물맛 좋기로 유명해,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 찾아와 차를 달여 마시며 이곳의 풍광을 시·서·화로 남겼다. 18년 강진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 정약용은 일생을 통해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에 비교할 만큼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다성(茶聖) 초의 선사는 해남 대흥사에서 천 리나 되는 이곳까지 좋은 차를 가져와 스승 다산을 뵙고, 또 다산의 아들 학연, 학유와 시연(詩宴)을 즐기며 교류를 했다. 시(詩)·선(禪)·다(茶)가 한곳에 어우러져 있다고 해 명명한 수종사 ‘삼정헌(三鼎軒)’에 들러 두물머리 천하제일의 절경 내려다보며 한 잔 차를 마시게 되면 선다일여, 시선일여의 경지에 들게 되고, 심신이 그대로 치유됨을 느낄 수 있다.
백원기
동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평생교육원장을 맡고 있다. 『불교설화와 마음치유』,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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