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지혜로 세워진 관촉사 은진미륵 | 사찰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다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

안녕과 행복을 염원하는
희망의 미래부처님

그림 | 한생곤

모래 놀이하던 ‘아이들의 지혜’로 우뚝 세운 은진미륵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한 후 56억 7,000만 년 뒤 나타나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미래에 오실 부처님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이며 염원의 상징이다. 때문에 현세에는 힘들지만 미래에 구제된다는 희망을 상징하는 미륵신앙이 민중에게 가장 와닿았던 것이다. 논산 반야산 기슭에 자리 잡은 관촉사는 고려 광종 19년(968) 혜명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관촉사가 품은 가장 빼어난 보물은 단연 ‘은진미륵(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이다. 화강암 자연 암반 대좌 위에 거대한 두 개의 돌로 머리와 팔각형 보관, 몸과 어깨를 조각하고, 면류관 형태의 보개(덮개)를 따로 만들어 조각한 다음 서로 연결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큰 돌을 옮겨 세울 수 있었던 것일까? ‘은진미륵불’ 조성에는 사제촌 냇가에서 모래 놀이를 하던 ‘아이들의 지혜’가 크게 작용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촛불을 보는 것처럼 빛나는 미륵불’을 품은 관촉사
반야산 기슭 마을 사제촌에 사는 두 여인이 산에 올라 고사리를 꺾고 있었다. 그들은 정담을 나누며 고사리 꺾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니! 고사리가 어쩜 이렇게도 연하면서 통통하게 살이 올랐을까요?”
“정말 먹음직하게도 통통하게 살이 올랐네요. 한나절만 꺾으면 바구니에 가득하겠어요.”
그 순간, 반야산 서북쪽 골짜기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 깊은 산중에 웬 어린아이 울음소리지요?”
“그러게 말이에요. 참 이상도 해요. 어디 한번 가볼까요?”
“그래요. 한번 가봐요.”
두 여인은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어린아이는 없고, 갑자기 땅이 진동하면서 눈앞에 거대한 바위가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요?”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봐요. 빨리 마을로 내려가 관가에 알립시다.”
신기하고 기이한 상황에 놀란 두 여인은 서둘러 마을로 돌아와 곧장 관가로 가서 고을 원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것참! 기이한 일이로구나!”
이야기를 다 들은 고을 원님은 나졸들을 보내어 사실을 확인했다. 이 소문은 곧 조정에 보고되고 임금님 귀에까지 들어갔다.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임금은 조정 대신들을 불러 이 일을 논의했다.
“상감마마,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는 필시 큰 부처를 조성하라는 길조이니 불상을 조성해 예배토록 함이 옳을 듯하옵니다.”
“의당 그러하심이 옳을 듯하옵니다.”
조정 대신들의 의견이 모두 한결같음에 임금(광종)은 당시 최고승인 “금강산 혜명대사를 모셔다 이 바위로 불상을 조성토록 하라”고 명을 내렸다. 혜명대사는 100명의 석공을 데리고 바위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바위를 본 순간 스님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음, 예사로운 바위가 아니로구나. 후세불인 미륵불을 크게 조성해 세세생생 이 민족의 기도처가 되도록 하리라.”

큰 발원을 한 스님은 작업을 지시하고, 대형 미륵불 조성 불사를 시작했다. 석공들은 솟아오른 큰 바위로 부처님 전신을 조성하는 줄 알았는데 혜명대사는 하반신만 지시하고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으셨다. 그렇게 부처님 하반신이 조성되자 스님은 가슴과 머리 부분은 그곳에서 약 30리쯤 떨어진 연산면 고정리의 우두골에 있는 바위로 만들어 일꾼 1,000여 명을 동원해 옮겨 왔다. 하지만 불상의 몸통과 머리를 따로따로 만들었기 때문에 몸통 위에 머리를 올려놓는 일이 간단치 않았다. 웬만한 무게라야 들어 올릴 터인데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던 스님은 깊은 시름에 빠져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의 지혜가 담긴 불상
그러던 어느 날, 혜명대사가 사제촌 시냇가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진흙을 가지고 3단 불상을 만들며 노는 어린아이 두 명의 행동이 스님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아이들은 먼저 땅을 평평하게 해 아랫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경사지게 쌓아 그 중간과 윗부분을 세운 다음 모래를 파내었다. 그리고 불상의 머리 부분을 굴려서 몸통 위에 쉽게 올려놓는 것이었다. 무심코 바라보던 혜명대사는 미륵불 쌓기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자신도 모르게 “옳거니!” 하고 무릎을 치고 탄성을 터뜨렸다. 실로 기막힌 방법이었다.

“맞아! 바로 그거야!”

혜명대사는 곧장 작업 현장으로 달려가 아이들이 했던 대로 공사를 지시하고 다시 시냇가로 왔다.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모래 놀이를 하며 노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재미있게 떠들며 놀던 그 아이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혜명대사에게 불상을 세우는 지혜를 알려주고 홀연히 사라진 두 어린아이를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화신이라고 했다. 아이들의 지혜를 빌려 삼등 불상을 무난히 세워 드디어 미륵불이 완성되었다. 무려 38년에 걸쳐 높이 18.2m, 둘레 11m, 귀의 길이가 3.33m나 되는 거대한 동양 최대의 석조 ‘은진미륵불’이 조성된 것이다. 불상을 완공하고 흙을 치우자 하늘에서는 비가 내려 불상의 흙을 말끔히 씻어주었고, 상서로운 기운이 삼칠일 동안 주위에 서렸다고 한다. 또한 미간의 옥호가 멀리 빛을 발해 중국 송나라에까지 이르렀고, 고승 지안(智眼)대사가 그 빛을 따라 고려 땅 논산(당시는 ‘은진’이라고 불렸음)으로 와서 불상에 예배를 한 후 ‘마치 촛불을 보는 것처럼 빛나는 미륵불’이라고 해 절 이름을 관촉사(灌燭寺)라 했다고 한다.

얼큰이 부처라 불려도 미소를 고집하는 ‘은진미륵’
요즈음 어린아이들이 가장 즐겨 하는 놀이 중의 하나가 모래 놀이라 한다. 공원이든, 해변이든 어느 공간에서나 어린아이들은 그들만의 맑은 마음의 지혜로 무언가를 쌓고 만든다. 그러한 청정심의 지혜에서 발현되고 형성된 물상을 통해 어른들은 배울 게 있다. 혜명대사가 은진미륵불을 완성했던 것도 사제촌 시냇가에서 모래 놀이를 하던 ‘아이들의 지혜’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갓이 너무 커서 얼큰이 부처라 불려도 미소를 고집하는 큰 귀, 큰 머리로 속세에 떠도는 바람의 언어를 씻어주는 ‘은진미륵’은 안녕과 행복을 염원하는 중생들에게 항상 포근하고도 인자한 희망의 미래불로 서 있다.

백원기
동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평생교육원장을 맡고 있다. 『불교설화와 마음치유』,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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