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익선
少少益善
김승현
그린 라이프 매거진 『바질』 발행인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
매일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분명 학교에서는 의식주라고 배웠는데, 도무지 그 세 가지로 살아질 것 같지 않았다. 하나씩 따지고 보면 입고 먹고 쉴 곳을 가진 것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상상해봤다. 밥이라도 지어 먹으려면 쌀이 내 손에 있어야 하고, 깨끗한 물이 필요하며, 불도 있어야 한다. ‘그래, 불 따위 포기하고 생쌀을 씹어 먹자’고 결심해도 만만치 않다. 생쌀을 씹어 먹겠다 생각하니 시작도 전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아…
내 턱. 익숙해질 수 있을까?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도대체 그 쌀을 어디서 구하느냐는 것이다. 1년을 농사지어 벼는 어떻게 길러냈다고 치자. 수확도 어떻게 했다고 치자. 낱곡식의 껍질 벗길 때 이 뭉텅한 손으로 그 작은 낱알들의 껍질을 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벗기려면 종일 해보았자 한 움큼의 쌀을 구할 수 있을까? 그렇게 까다가는 쌀을 입에 넣어보기도 전에 배고파 쓰러질지도 모르겠다. 돌멩이라도 있어야 껍질을 좀 더 쉽게 깔 수 있지 않을까? 껍질 까기에 골몰하다 보니 동물들이 부러워졌다. 동물들은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 없이 그냥 한 번에 먹으면 몸에서 껍질이든 뭐든 알아서 걸러주니 말이다. 내가 하면 위벽이나 긁힐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밥을 지어 먹어야겠다.
낱알 껍질을 돌멩이로 빻아 벗겨내고 나오는 쌀알을 익혀 먹으려면 그 또한 만만치 않다. 흐르는 강물을 떠오고 열심히 마른 나무를 비벼 불까지 구한다 해도 쌀알을 익히는 것이 문제다. 쌀 한 톨은 길이가 5mm도 되지 않을 만큼 작다 보니 손에 들고 익힐 수도 없고 천상 그릇이 필요하게 된다. 결국 내 삶에는 그릇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했다. 게다가 밥을 하느라 주린 배를 조금이라도 빨리 채우려면 숟가락이든 젓가락이든 이 뜨거운 것을 들 도구가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채우다 보니 쌀, 돌멩이, 물, 불, 그릇, 수저에 온갖 것들이 늘어났다. 상상 속에서 나를 둘러싼 물건은 필요한 것에서 좋아 보이는 것으로 확장해나갔다.
수많은 생명과 함께 살기 위한 소박한 삶
현실은 생각의 투영이라 했던가? 내 삶도 상상에서처럼 많은 것으로 채워졌다. 필요한 것만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왜냐면 여기에는 내가 나에게 맞는 것을 찾겠다며 들인 것들도 있으니 말이다. 다섯 종류의 내 숟가락들은 그렇게 왔다. 종류는 다양하지만, 쓰는 놈만 쓴다. 좋아 보여서, 오늘 사지 않으면 다시 만날 수 없을 거 같아서 나와 인연을 맺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봄기운을 느끼고 싶어 산 꽃과 곤충이 그려진 그릇, 겨울을 연상시키는 검은 그릇 등을 가져와 채웠고,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아 아예 도자기 만드는 법을 배워 사계절 그릇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마음에 드는 그릇을 써보겠다고 온갖 것을 모았으면서 정작 내가 쓰는 것은 마트에서 저렴하게 샀던, 깨져도 아쉬울 것 없는 그놈을 주야장천 쓰고 있다. 사다놓은 물건들이 내 손을 타게 할 기회를 골고루 주려고 해도 습관이 무서운지라 잘 되지 않는다. 내 손에 있으면 공간만 차지하고 빛도 못 보는지라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해도 쉽지 않다. 꼭 마지막 순간에 그 물건과 나 사이에 쌓인 추억 – 만났던 순간, 샀던 이유, 즐겁게 한 번이라도 썼던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 도로 집으로 돌려놓게 만든다.
이런 종류가 비단 이것뿐이겠는가? 그렇게 쌓인 물건들이 쌓여 이사할 때 혼자만의 짐으로 5톤 트럭 문을 겨우 닫을 수 있었다. 이사 후에 자전거를 두고 온 사실을 알아챘지만 말이다.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현재 소유의 성적표이다. 지구의 한정된 자원을 고려할 때, 이 수많은 생명이 함께 살려면 소박한 삶, 적게 갖는 삶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삿짐 트럭이 보여준 내 소유는 지구의 눈으로 볼 때 과하게 가진 삶이었다. ‘현대인의 삶이란 원래 이런 거야’라고 변명이라도 해보려니 그 현대인의 삶이 지구를 과하게 갉아먹고 있다. 짐을 싸고 다시 풀면서 나는 내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순간’ 필요한 것들을 부지런히도 사들였다는 걸 느꼈다. 늘 쓰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물건은 이 중 10%나 되었을까? 잘 모르겠다. 있으니까 쓰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갔을 것들이 대다수였다. 어떻게 해서든 부여잡고 있는 물건들조차도 ‘나, 이런 사람’이라고 증명하듯 가지고 있는 잔재였다. 사실 내가 나를 증명하려는 사이, 나 같은 사람들 때문에 지구는 뜨거워졌고 숲과 바다는 고갈되고 있으며, 인간을 제외한 다른 생물들은 살기 힘들어졌다.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이런 생각을 해봤다. 만약 내 생의 마지막까지 남기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무엇일까? 23만 명이 넘게 사망한 인도네시아의 쓰나미 같은 감당할 수 없는 환경 재앙이 닥쳐온다면 나는 무엇을 가지려고 하게 될까? 정말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 온다면 내가 부여잡고 있던 많은 물건이 무슨 소용인가? 나는 나 자신이 이렇게 물건들을 늘어 붙이며 사는 것은 이 평온함이 지속될 것이라는 허상의 믿음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허상임을 증명하듯, 지금 지구는 생명들에게 불타고 있는 행성이 되었고, 평온한 일상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북극곰의 비극, 호주의 산불, 인도의 빙하 쓰나미는 한라산 구상나무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내가 지구의 입장에서 너무 많은 것을 가진 것에서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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