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심(至心)으로 부처님 닮으려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부처가 아닐까요
김천 불령산 청암사
불령산(佛靈山, 1327m, 흔히들 ‘수도산’이라 부른다)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청암사(靑巖寺)에도 봄꽃이 흐드러졌겠지요. 전각 뜨락의 매화는 졌을 터이고, 육화료(六和寮) 앞 자목련도 제 모습대로 피어났겠지요. 아마도 이 글이 독자들과 만날 즈음에는 꽃보다 더 꽃 같은 신록이 봄날의 광휘를 드리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들 이 계절을 일러 ‘새봄’이라 하지만 사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복입니다. 이렇듯 단순한 반복을 우리는 늘 새롭게 만납니다. 얼마나 거룩한 반복인지요.
이 글을 쓰기 위해 KBS TV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3일> ‘떠남과 만남-김천 청암사 승가대학’을 다시 보았습니다. 환희심이 일었습니다. 카메라를 든 이방인의 호기심은 무례의 문지방을 넘지 않았고, 학인들의 모습은 자연스러웠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모방(模倣)’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모방 혹은 따라 하기. 이보다 쉬운 일은 없을 듯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부모 혹은 양육자를 모방하며 말을 배우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익힙니다. 예술 분야에서도 기본적인 기예를 익히는 단계까지는 어떤 ‘전범’을 따르는 일, 즉 모방의 과정을 거칩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궁리를 익히는 일이든 예술 분야든, 모방은 일정 기간과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만 유용합니다.
위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어떤 모방’은 지극히 초보적인 단계에서부터 지극히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혜묵 스님이 한 말이 오롯이 가슴속에 새겨졌습니다. “(…)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서, 저희가 목표로 하는 부처님을 닮아가고, 또 그렇게 행을 하는 것, 그게 저희 목표죠.”
부처님같이 살기. 이런 모방, 따라 하기는 어떨는지요. 솔직히 저 같으면 하루, 한 시간, 아니 1분도 불가능합니다.
청암사는 비구니 승가대학으로 이름 높은 절입니다. 신라 헌안왕 3년(859)에 도선 스님이 창건한 고찰로, 화엄 종장 진언 스님(1622~1703)이 강원을 개설한 이래 조선을 대표하는 강원의 하나로 이름을 드날렸습니다. 근대에는 고봉(1901~1967) 스님, 우룡 스님, 고산 스님 같은 강백이 거쳐 가며 명맥을 이었으나 1970~80년대를 거치며 동네 사람도 찾지 않는 절이 되었습니다. 이런 절을 1987년 현재 승가대학 학장이신 지형 스님(당시 주지)이 현 주지이자 교수인 상덕 스님(당시 재무)과 함께 청암사 승가대학을 세움으로써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청암사에 가면 절집과 자연만 보지 마십시오. 스님들의 검박으로 빛나는 일상과 절제를 넘어선 절도를 보십시오. 자유는 그런 삶에서 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곳에서 학인을 만나면 미래의 부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부처를 만난 것입니다. 사미니, 비구니 하는 위계도 제게는 별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모두 위의에 모자람이 없는 수행자들이었습니다.
사진│우태하(항공사진가), 글│윤제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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