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길을 찾다 - 광부의 삶이 녹아 있는
첩첩산중 고원길
운탄고도(運炭古道)
한때 석탄이 오가던 운탄고도는 꿈 많은 청춘처럼 찬란했다. 아득한 길은 파란 하늘과 점점 가까워졌고 끝내 어느 정점에서 둘은 하나가 되었다. 그저 그 내막을 가슴 깊이 품고 있는 여행자의 발길에만 조금의 아득함이 남을 뿐이었다.
만항재는 운탄고도의 출발점이자 종착지다.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 1,330m. 이곳에서 출발하면 내리막이 많아 반대편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수월하다. 초반 약 1km는 평지에 가까웠고, 이후 구불구불한 내리막이 이어졌다.
몇 해 전, 눈이 내린 한겨울 반대편에서 출발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구불구불한 이 오르막을 오르며 ‘아사’를 걱정했었다. 누구에게 말도 할 수 없는 웃지 못할 해프닝. 중간에 텐트를 치고 1박을 할 계획이었다. 문제는 길을 잘못 들어서 하염없이 내리막을 걸었고 그곳은 반대 방향이었다. 우리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했을 때는 늦은 오후가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1박을 하고 이튿날 길을 걸었다. 애초의 계획대로라면 이튿날 점심 무렵 만항재에 도착해야 했다. 그래서 준비한 음식도 저녁과 아침 달랑 두 끼.
점심 무렵까지도 의기양양했다. 배는 고팠지만 조금 더 걸으면 만항재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항재는 멀었고 비상식량으로 챙긴 미니 초코바 몇 개로 겨우 버텼다. 구불구불한 이 코스를 오를 때는 탈진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고 너무 배가 고파서 더 이상 걸을 수도 없었다. 가다 쉬다를 반복했고 만항재에 도착했을 때는 하늘에서 별이 빛나고 있었다.
그토록 힘겹던 구간이 이토록 편안한 구간으로 바뀐 셈이다. 내리막 후에는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평탄한 구간. 늦여름, 길을 걷기 좋은 계절이었으나 운탄고도에는 사람들의 흔적이 없었다. 1,100m 능선을 따라 걷는 내내 조금은 고독했고 조금은 행복했다. 세상과 단절된 느낌. 그러면서도 하늘과 맞닿은 운탄고도를 오로지 나 혼자 차지하고 있다는 기쁨.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하이원CC 갈림길을 지나서였다. 콘도에 숙박한 여행자들이 운탄고도의 일부를 걷고 있었다. 그래봐야 서너 무리. 그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걸었다. 가끔은 길이 숲이 되었고, 가끔은 끝도 없는 능선들이 눈높이에서 펼쳐지는 전망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다 도착한 1177갱. 지금의 갱은 복원한 것이지만 본래의 1177갱은 우리나라 석탄 산업의 시발점이 되었던 곳이다. 1177갱이 개발된 이후 여러 탄광이 생겼으며 그때 채탄된 석탄들을 나르기 위해 이토록 높은 산에 길을 만들었다.
산 아래 마을에는 검은 먼지가 내려앉는 탄광촌이 형성되었다. 출근한 광부가 벗어놓은 신발은 늘 안방을 향했다. 행여 신발의 방향이 밖을 향하게 놓는 것은 금기에 가까웠다. 아침에 출근한 남편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신발의 방향은 지하 막장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는 남편이 저녁 시간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소망이었다.
1177갱에서 약 1.7km를 더 걸으면 도롱이연못을 만난다. 도롱이연못은 1970년대 탄광 갱도의 지반침하로 생긴 연못이다. 광부의 아내들은 이곳에 살고 있던 도롱뇽에게 남편의 무사고를 기원했다. 연못에 도롱뇽이 살고 있는 한 남편들도 무탈할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 중에 그토록 절박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1970~80년대 석유파동과 함께 석탄 산업이 부흥했고, 당시 강원도의 탄광 도시들은 국가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면서 석탄 산업은 쇠퇴기를 맞이했고 탄광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탄을 나르던 길마저 사람들에게 잊혀갔고 목숨을 담보로 돈을 벌어야 했던 막장 사람들의 삶도 오래된 사진처럼 낡아갔다.
잊혔던 길은 ‘운탄고도’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차마고도’에 비교될 정도로 아름다운 고원길이다. 하지만 길은 아름다워도 그 길에 스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조금 쓸쓸하다. 우리가 그 길을 걸으며 행복한 것처럼, 그 길에 온전히 삶을 바쳤던 사람들이 이제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우리처럼 행복해야 한다.
도롱이연못에서 마운틴콘도로 방향을 잡았다. 아기자기한 오솔길이라 이제까지 걸었던 길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이제 3.6km만 더 걸으면 길은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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