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노년의 삶은 정신적 원숙함을 향한 여정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보는 노년의 삶
인간의 본래 마음을 찾는 시간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이가 60대가 되고 보니 친구들과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온통 90대 전후 부모님 모시기에 관한 것이다. 연로하신 부모님 중에는 신체적 병으로 누워 있거나 치매로 사리 판단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부모님이 요양병원에 계시면 그나마 낫고, 요양병원은 죽어도 싫다고 집에 머물면 부모를 모셔야 하는 자식들의 삶도 그만큼 힘들어진다. 본인도 환갑 지난 노인이라 팔다리도 아프고 기억력도 쇠퇴해가는데, 노인이 노인을 모셔야 하니 신체적 정신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우리는 왜 사는 것일까?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평생 수고롭게 살고 난 노년의 모습이 왜 이렇게 비참한 것일까? 24시간 먹고 싸고 자는 것이 전부이고, 그렇게 단지 살기 위해 사는 이 삶이 갖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인간의 삶은 그냥 생존 그 자체가 목적이고, 거기에 덧붙여지는 다른 모든 가치는 그 삶의 본능을 미화하기 위한 포장에 불과한 것일까? 삶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노인이면 삶을 살아온 시간이 긴 만큼 세월의 풍파에 모가 깎기고 때가 씻기어서 마치 강가의 조약돌처럼 둥글둥글 원만하고 부드럽고 자애로울 것 같지만, 그건 그저 희망 사항일 뿐 실제 대부분의 노인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노인의 두드러진 특징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고 하는데, 하나는 자기중심성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배금주의라고 한다. 게다가 이 특징이 아무런 필터링 없이 그대로 노출될 때, 그것이 곧 치매의 초기 증상이라는 말도 있다. 젊어서는 가족이나 국가 또는 진리나 정의를 위해 사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던 사람이 서서히 또는 갑자기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될 때, 나만 등 따시고 배부르면 그만이고 주변 사람 심지어 자식이 어떤 고통을 당하는가에 대해서조차도 무감각해질 때, 또 노년의 나를 지켜줄 버팀목은 돈밖에 없다는 믿음으로 돈에 집착하면서 주변 사람을 향해 돈을 더 주지 않는다고 분노하거나 내 돈을 슬쩍 빼간다고 의심하는 일 등이 벌어질 때, 그것이 곧 노년의 특징이고 치매의 초기 증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늙어간다는 것이 서글프다가 문득 이런 것이 어디 노년의 모습일 뿐이겠냐는 생각에 섬뜩해진다. 사람은 대개 자신이 내 편이라고 울타리 쳐놓은 그 바깥의 사람들이 살든 죽든 무관심하지 않은가. 그리고 내가 친 울타리를 견고하게 지탱하는 힘이 결국 돈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서 평생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전력 질주하지 않는가. 그러니 그것이 어디 노년만의 특징이겠는가. 노년이 되어 울타리도 허술해지고 울타리 안 다른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 그 안에 혼자 남게 되면 결국 자기중심적이 되고 홀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 돈만 생각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보면 노년의 모습, 심지어 치매의 모습도 갑자기 밖에서 찾아온 낯선 것이 아니라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방식이 그대로 축적되어 습(習)이 되어서 그 실상이 드러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 외부 전시용으로 착용해왔던 가면과 포장이 벗겨지면서 그동안 마음 안에 깊이 감추어두었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노년에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길은 무엇일까?
우리는 대개 신체적 노화보다 정신적 노화인 치매를 더 두려워한다. 몸이 불편해도 정신이 멀쩡하면 내 삶의 방식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지만, 몸이 멀쩡해도 치매가 되면 몸도 정신도 모두 내가 아니게 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치매를 두려워하면서, 뇌신경이 병들지 않게 하려고 엽산 등 각종 영양제를 먹고, 수학 문제를 풀거나 영어 단어를 외우는 등 뇌를 단련시키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그런데 미국의 전직 대통령 레이건도 말년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것을 보면, 머리를 쓴다고 해서 치매에 걸리지 않는 것도 아닌 듯하다. 내 몸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듯이, 내 마음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인데 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일까? 마음은 어떤 구조로 되어 있기에 내 마음대로 유지되지 않고 어느 순간 내 통제력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마는 것일까? 노년이 되어도 내가 끝까지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과연 있을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기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가장 표층적인 분별적 의식, 소위 제6의식이다. 전5식은 감각하는 5감의 식이고, 제6의식은 사유하고 판단하는 식이다. 제6의식의 사고는 개념적 분별적 사고이다. 나누고 쪼개고 구분해 이것과 저것이 어떤 점에서 다르고 어떻게 차이 나는지, 그 차이점을 찾아내어 개념화하고 그 개념에 따라 분류하고 판단하는 사고이다. 나누고 쪼개고 분별하는 것에 익숙하다 보면, 공통점을 찾아내어 이것과 저것이 사실은 다르지 않은 하나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능력은 감소한다. 사과와 배를 서로 다른 것으로 구분하다 보면, 그 둘이 과일이라는 공통점은 망각된다. 차이가 전경으로 드러나면, 공통점은 배경으로 물러나고 잊힌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고, 나는 선하고 너는 악하다는 분별심이 커지면, 너와 나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고 내 안에도 또 네 안에도 선악이 함께한다는 것은 잊어버리고 만다. 그렇지만 차이는 공통점의 기반 위에서 성립하고, 분별은 무분별의 지평 위에서 행해진다. 공통의 기반을 치워버린 차이, 무분별의 바탕을 망각한 분별은 그야말로 허공 속에 떠 있는 허망분별에 불과하다. 그 차이는 다시 그다음의 분별을 통해 새롭게 등장하는 또 다른 차이의 배경으로 물러나고 부정되기 때문이다. 한 세대의 분별은 그다음 세대의 분별을 통해 부정되고 무너진다. 그러므로 차이에만 집착하는 일체의 분별은 모두 허망분별이고 누구도 거기 기대어 머무를 수 없는 망상인 것이다.
나이가 들어 노년에 접어들면서 점점 약화되는 것은 끝없이 나누고 쪼개는 예리한 분석력과 분별력이다. 사실은 허망분별의 차이를 통해 만들어놓은 그 허구 세계의 허상에 매달려 사는 삶의 피로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이라고 본다. 평생을 허망분별의 세계 속에 살다가 늙어서 분별력과 지구력이 떨어져 그 허망분별의 세계가 무너져 내릴 때, 그 마음이 돌아갈 자기 자리를 알지 못한다면, 그 마음은 폐허 속을 헤매고 다니며 방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 젊어서부터 차이를 보되 차이 너머의 공통점을 보고, 분별하되 그것이 개념에 따른 허망분별임을 알아, 자신에게 분별 너머의 무분별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면, 허망분별의 세계가 무너진다 한들 흔들림 없이 마음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 평정을 유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무분별의 본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우리의 일상의 마음인 제6의식이 나누고 쪼개면서 찾아낸 차이에 머무르는 게 분별의 마음이라면, 무분별의 본래 마음은 그렇게 나누고 쪼개어 만들어진 차이의 바탕에 그 차이 나는 것들을 하나로 포괄하는 공통의 기반이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다. 너와 나의 생각의 차이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 차이 나는 생각의 바탕에는 그보다 더 크고 더 깊은 공통의 생각이 깔려 있으며, 그 공통점 안에 너와 나를 하나로 연결하는 생명의 흐름이 있고 감정의 소통이 있다는 것, 그렇게 우리는 근본에서 하나라는 것, 하나의 생명이고 하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아는 마음이다. 다양한 사물들을 어느 것 하나도 배제하지 않고 모두를 하나로 품고 있는 허공처럼 인간이 만든 모든 허망분별의 차이를 뛰어넘어 일체를 하나로 두루 포괄하는 빈 마음이 바로 인간의 본래 마음이다.
『능엄경』을 풀이하면서 진감 선사는 “붓다는 우리의 마음(식)을 허공에 비유하여 몸이 죽어도 가는 것이 아니어서 죽기 전에도 본래 여기에만 국한되지 않고, 몸이 태어나도 온 것이 아니어서 태어나기 전에도 본래 여기에 항상 두루 하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고 말한다. 생이 저기에서 여기로 오고, 사가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것 같지만, 마음은 허공처럼 여기와 저기를 모두 포괄해 두루 하기에 오고 감이 없는 ‘불래불거’이고, 태어남과 죽음이 없는 ‘불생불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불래불거 불생불멸의 마음, 그 안에 등장하는 일체 장애에 걸리지 않는 자유로운 무애(無碍)의 마음, 소위 부처의 마음, 보살의 마음, 신의 마음이 바로 인간의 본래 마음이다.
그러나 실제로 중생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허공 속 내 몸을 나로 알고, 그 몸에 기반한 느낌과 생각을 내 마음이라고 집착하며 살아간다. 내 몸에 기반해서 너와 나를 나누고, 그 몸에 기반한 분별적 마음을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작 전체를 포괄하는 허공과도 같은 본래 마음은 잊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취해야 할 삶의 목표는 분별심 너머 허공과도 같은 그 빈 마음을 나의 본래 마음으로 자각하고, 그 빈 마음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언제나 그 빈 마음자리에 머무를 수 있게끔 마음 비우기를 완수하는 것이 삶의 과제이고 의미인 것이 아닐까? 빈 마음이 되어 일체 중생과 하나로 소통하는 것,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소중함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일체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자비의 마음을 갖는 것,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 숨 쉬는 삶 자체를 숭고한 가치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인생의 궁극 지향점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서양 철학(칸트)을,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불교철학(유식)을 공부했다. 현재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유식무경: 유식 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불교철학과 현대 윤리의 만남』, 『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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