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노년의 삶은 정신적 원숙함을 향한 여정이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는 노년의 삶
노년기는 마음 수행이
가장 필요한 시기
권석만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우리나라는 2025년에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다. 내후년이면 65세 이상의 노인이 전체 인구의 20%를 넘어서는 장수 국가가 되는 것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까지 5년 사이에 사망한 한국인의 평균 연령은 남성이 85.6세이고 여성은 90세다. 60세 전후에 삶이 끝나던 과거와 달리, 환갑 이후에도 20~30년간 삶을 지속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건강을 잘 지키면 100세 이상 살 수 있는 장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장수는 모든 사람의 소망이지만 축복만은 아니다. 노년의 삶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재앙이 될 수 있다. 가난, 질병, 고독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영위하며 가족과 사회에 부담만 주는 골칫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잘 늙고 잘 죽는 것이다. 웰에이징(well-aging)과 웰다잉(well-dying)은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늙는다는 것의 의미
“죽음은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으며, 그곳에 이르는 만 개의 길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노년기에 접어들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은 건강, 재력, 가족 관계, 성격 등에 따라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펼쳐지게 된다. 먼저 늙어간 인생 선배들의 경험담과 조언이 무수하게 많지만,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처음 가보는 노년기 인생의 먼 길을 가야 한다.
달도 차면 기울고, 산길도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노년의 삶은 인생의 내리막길을 가는 여정이다. 정상에 오르려 애쓰던 치열한 삶을 뒤로하고 자신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늙어가는 과정에서는 젊은 시절에 소중하게 여겼던 삶의 가치들과 이별하게 된다.
육체적 노화가 진행되면서 젊은 육체와 이별하게 된다. 아름답고 싱싱했던 몸과 이별해야 한다. 감각-운동 기능도 저하되어 물건을 잘 떨어뜨리고 넘어질 뿐만 아니라 기억력이나 기민성과 같은 심리적 기능도 서서히 감퇴한다. 자녀가 성장해 독립하면서 부모의 역할과도 이별하게 된다. 은퇴라는 중요한 사건을 겪으면서 오랜 세월 일해온 직장과 이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료들과도 이별해야 한다. 그리고 부모의 죽음을 맞게 되면서 부모와의 영원한 이별을 감당해야 한다. 친밀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하나둘 이 세상에서 사라져간다. 이처럼 늙는다는 것은 소중한 것들과 이별하는 상실 과정이다. 이러한 이별과 상실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노년기의 중요한 과제다.
노년기에 펼쳐질 세 단계의 삶
현대 사회가 고령 사회로 진입하면서 심리학 분야에서도 노년의 삶과 성공적 노화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에는 노년기를 인생의 짧은 마지막 단계로 여겼지만, 요즘은 노년기가 30년 이상의 긴 기간으로 연장되었기 때문에 흔히 세 단계, 즉 노년 초기, 노년 중기, 노년 말기로 세분되고 있다.
노년 초기는 건강을 유지하면서 사회 활동이 가능한 시기로서 65세에서 75세 전후의 시기를 말한다. 건강, 재력, 가족 관계를 잘 유지한 사람들은 노년 초기에 행복도가 증가한다. 직장 생활과 자녀 양육의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며 인생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잘 유지하면 노년의 행복한 삶을 상당 기간 연장할 수 있다.
그러나 세월 앞에 장사가 없듯이, 노화가 진행되면서 질병이 발생한다. 노년 중기는 질병 발생과 함께 병원을 자주 오가면서 사회생활이 위축되는 시기로 대체로 76~85세에 해당한다. 2021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의 가장 흔한 사망 원인은 암이다. 전체 사망자의 26%가 암으로 사망했다. 다음으로 흔한 사망 원인은 심장 질환이며 폐렴, 뇌혈관 질환, 자살, 당뇨병, 알츠하이머병, 간 질환, 패혈증, 고혈압성 질환의 순서로 이어진다. 노년 중기는 노화가 가속화되면서 병고(病苦)를 겪는 시기다.
노년기의 어떤 시점에 이르면 홀로 설 수 없는 때가 찾아온다. 노년 말기는 질병이 악화되거나 심신 기능이 쇠퇴해 자율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시기를 의미한다. 자율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의 활동(쇼핑하기, 요리하기, 빨래하기, 집안일하기, 약 복용하기, 전화 사용하기, 혼자 외출하기, 돈 관리하기)을 혼자 할 수 있어야 한다. 노년 말기는 일상생활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하는 시기다. 노화가 더 진행되면 여덟 가지의 일상 활동(침대에서 일어나기, 밥 먹기, 화장실 가기, 옷 입기, 목욕하기, 머리 손질 등 몸단장하기, 의자에서 일어나기, 걷기)에서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자율적인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 세 가지 경로 중 하나로 옮겨가게 된다. 첫째 경로는 가정에서 배우자나 자녀의 돌봄을 받으면서 생활하는 것이다. 둘째 경로는 재가 상태에서 요양사의 방문을 통해 도움을 받으며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셋째 경로는 신체적, 심리적 기능이 현저하게 저하되어 가족이 돌보기 어려운 경우에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입원하는 것이다. 어떤 경로를 선택하든 노년 말기에는 질병이 악화하거나 여러 가지 합병증이 발생하면서 임종을 맞게 된다.
많은 노인이 ‘구구팔팔이삼사’하기를 원한다.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 앓고 4망하기를 소망한다. 달리 말하면, 노년 초기의 행복한 삶을 최대한 연장하고 노년 중기와 말기에 겪게 될 고통을 이삼일로 압축해 인생이 끝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문제는 ‘9988’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어떻게 ‘234’하느냐는 것이다.
노화 불안과 죽음 불안에 대한 대처 방법
몸은 늙어도 마음은 쉽게 늙지 않는다. 늙는 것이 두려운 이유는 마음이 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노화 불안(aging anxiety)을 경험한다. 노화 불안은 노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더불어 자신의 외모가 늙어가는 것, 노년기에 불행해지는 것,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한다. 노화 불안의 기저에는 죽음 불안(death anxiety)이 존재한다. 늙는 것이 두려운 이유는 몸과 마음이 시들어갈 뿐만 아니라 죽음이 다가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노화 불안과 죽음 불안에 대처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건강과 장수를 위해 운동과 건강식품에 과도하게 집착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녀와 심리적으로 유착하면서 자녀에게 의존하기도 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돈은 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듯이, 어떤 사람은 자녀도 믿지 못해서 돈에 더욱 집착하기도 한다. 때로는 정치적 이념이나 집단 활동에 과도하게 몰두하는 사람도 있다. 노화 불안과 죽음 불안을 완화하기 위해 어떤 대응 방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노년의 삶은 현저하게 달라진다.
건강, 자녀, 돈, 정치적 신념의 성벽을 아무리 높이 이중 삼중으로 쌓더라도 노화와 죽음의 침입을 막을 수는 없다. 성벽 사이를 침투하는 노화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면, 노화 불안은 노화 우울(aging depression)로 진행된다. 노화 우울은 좌절감 속에서 삶의 의욕을 잃은 채 자신의 인생 전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며 허무감과 절망감을 경험하는 심리 상태를 뜻한다. 가진 것이 많아서 지켜야 할 것도 많은 사람일수록, 노년기에 더 강한 불안과 우울에 시달릴 수 있다.
원숙한 노년의 삶을 위한 조건
노년기는 인생을 깊이 음미하면서 원숙한 삶으로 익어가는 소중한 시기로 잘 늙기 위해서는 심리적 숙성 과정이 필요하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나타나는 몸과 마음의 노화 현상을 지켜보면서 저항하기보다 수용하는 것이다. 물론 심리적 숙성을 위해서는 깊은 사색과 고뇌 속에서 수많은 불면의 밤을 보내며 솟아오르는 끈질긴 집착을 달래야 한다. 심리적으로 잘 숙성된 사람은 인생의 변화에 대한 받아들임과 너그러움이 깊어진다.
불교는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괴로움에 가장 원숙하게 대처하도록 돕는 종교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20대의 나이에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수행자의 길에 나선 것은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대처 방법을 발견하기 위함이었다. 종교적 천재들은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하는 인간의 실존적 운명을 젊은 나이에 뼈저리게 느끼고 그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원숙한 노년의 삶을 위해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를 마음 깊이 새기면서 자신과 세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방하착(放下著)의 노력이 필요하다. 노년기는 채우기보다 버리고 갈 일만 남아서 삶이 더욱 가볍고 자유로워지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시기인지 모른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처럼, 노년기에 나타나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담담히 바라보면서 미소 지을 수 있는 관조적 자세를 굳건하게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년기에 찾아오는 집착과 유혹 그리고 고통과 공포를 또렷하게 깨어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으려면 마음 수행을 통해 관조의 힘을 길러두어야 한다. 노년기는 마음 수행이 가장 필요한 시기일 뿐만 아니라 마음 수행을 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기도 하다.
권석만
서울대학교 심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호주 퀸즐랜드대학교에서 박사 학위(임상심리학 전공)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삶을 위한 죽음의 심리학: 죽음을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 『긍정심리학: 행복의 과학적 탐구』, 『현대 심리치료와 상담 이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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