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이란 무엇인가
정준영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그림|김아름 |
모든 것은 변하나?
초기 불교에는 ‘삼법인(三法印)’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발생하는 모든 현상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무상(無常)’, ‘고(苦)’ 그리고 ‘무아(無我)’이다. 첫 번째인 무상(無常, anicca)은 ‘영원하지 않다’는 의미로 ‘모든 것은 변한다’이다. 두 번째인 ‘고’는, 괴로운 감각과 정서뿐만 아니라, 변하는 모든 것들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의미다. 그리고 세 번째인 ‘무아’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즉 무상함 속에서 ‘아트만(atman)’과 같은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다’이다. 나는 삼법인 중에 무상함에 대해 말하겠다.
『법구경(法句經)』 277게송은 “sabbe saṃkhara aniccā 제행무상(諸行無常)”으로 시작한다. 붓다는 “‘모든 행들이 변한다’라고 분명히 알면, 괴로움을 떠나 청정한 길로 간다”고 설하신다. 여기서 행(行, saṇkhara)은 형성된 모든 것들, 그리고 조건 지어진 것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서로 조건에 의지해 형성된 모든 것들은 변한다’이다. 그리고 이렇게 아는 것을 지혜라고 부른다.
하지만 무상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다. 어떤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변하는 것은 당연한 건데, 뭐 이런 것을 법(法, dhamma)이라 하고 청정의 길(道)이라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먼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견해를 위해서는 ‘개념(concept)’과 ‘실제(reality)’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 우리가 정한 약속과 개념은 변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조건 지어진 실제 현상 중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예전에 어머님과 장을 보러 마트의 과일 코너에 갔다. 사과를 사려는데, 어머님께서 돋보기를 쓰셔서 다 커 보인다고, 나보고 골라보라 하셨다. 잘못 고르면 나중에 곤란하니 색깔도 보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만져보고 했던 기억이 난다.
옆에 표지판에 ‘사과 만 원에 5개’라고 적혀 있다. 가격과 개수가 분명히 정해져 있는데, 왜 사과를 골라야 할까? 그냥 다섯 개 가져가면 되지 않을까? 물론 요즘은 당도도 표시하고, 상한 것은 바꿔주고 서비스가 좋아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단 하나의 사과라도 좋은 것을 찾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사과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름도 같고 개수도 같지만, 사과마다 다르다. ‘사과 만 원에 5개’라는 안내는 ‘개념’이다. 사과마다 모양과 색깔이 다른 것은 ‘실제’이다. 개념은 우리가 서로 정한 약속이기에 모두에게 공통적이고, 소통할 수 있고, 정의 내리기 쉽다. 약속을 바꾸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는 우리가 정한 약속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현상이다. 따라서 다를 수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진짜 모든 것이 변하나? 아니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개념이고 언어적인 약속이지 실재하는 현상이 아니다. 붓다의 무상은 개념이 아닌 조건 지어진, 실재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변하는 것은 당연한 건데, 뭐 이런 것을 법(法)이라 하고 청정의 길(道)이라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더운 날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을 생각해보겠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더운 햇살에 녹기 시작한다. 아이는 다급해진다. 손으로 흘러내리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이라도 더 먹으려고 바빠진다.
아이도 단단하고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녹아 흘러 변하는 것을 안다. 여름과 겨울이 있어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안다. 이렇게 변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이것을 아는 게 어떻게 지혜로 분명히 알아 괴로움으로 벗어나 청정의 길이 될까?
붓다께서 설하신, 무상함을 분명히 아는 것은 아이스크림이나 계절의 변화와 같이 외적 대상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만이 아니다. 내 안의 경험을 통해 무상함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몸의 감각일 수도 정서일 수도 있다. 호흡일 수도 통증일 수도 있다.
내적 대상, 즉 자신을 ‘인사이트(insight)’하는 것이다. “내가 실제로 경험하는 모든 현상들은 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상함을 이해하기 위한 초기 불교의 수행법이고, ‘위빠사나(vipassanā, 觀) 수행’이라 부르기도 한다. 무상함을 경험하는 것이다.
변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의 변화를 만나고 있는 그대로 아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집착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수행의 목표일 것이다.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나 자신을 스스로 아는 것, 이것이 우리 인간이 지닌 위대함이다. 붓다는 우리에게 이 가르침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준영
스리랑카 국립 켈라니아대학교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주제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명상학 전공 교수로 있으면서 대원아카데미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 다른 명상』 등이 있다.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