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품고 있는
자연의 깊이
신준환
동양대학교 산림비즈니스학과 교수
사찰에 가보면 소나무와 같은 침엽수는 좋아하는데 주변에 흔하게 자라는 참나무와 같은 활엽수는 싫어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사찰 진입 공간에 소나무와 함께 자라는 활엽수는 ‘잡목’이라 치부하며 제거해야겠다는 소리를 가끔 듣는다. 물론 사시사철 푸름을 자랑하며 곧게 자라는 침엽수는 아름다운 나무이다. 특히 늙을수록 붉은빛을 더하는 줄기에 푸른 잎의 가지도 멋있게 자라는 소나무는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그래도 삼라만상이 다 그러하듯 이리저리 몸을 굽히고 자라서 잡목처럼 보이는 활엽수도 자기만의 때깔이 있다.
나무는 모두 곧게 자랄 운명을 타고났다. 땅에서 크게 자라기 위해서는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생장해야 하고, 광합성 에너지를 잘 생산하기 위해서도 곧장 햇빛을 향해 자라야 한다. 그래서 침엽수는 하늘을 향한 정아(頂芽: 끝눈)가 옆으로 난 측아(側芽: 곁눈)보다 우세하게 자라서 아주 곧게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나무가 곧게만 자라면 더불어 살아야 할 숲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모두가 나만 옳다고 소리치는 사회와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침엽수 다음에 활엽수가 진화할 때는 정아우세성이 좀 줄어들고 기회가 되면 측아도 잘 자라게 진화한 것이다. 활엽수는 내로라 주장하는 침엽수 사이에 몸을 굽히며 숲을 지탱해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나무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보고 침엽수는 정아우세성이 강하다고 하고 활엽수는 정아우세성이 약하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활엽수도 정아우세성이 약할 뿐이지 없는 것은 아니다. 햇빛을 잘 보기 위해 나무는 대체로 위로 곧게 뻗어 자란다. 활엽수도 서로 어울리기 위해서 굽게라도 자라는 것이지 곧게 자랄 줄 몰라서 굽은 것은 아니다. 관목이나 느티나무 같은 몇 종을 제외하면 활엽수도 홀로 클 때는 곧게 자란다.
활엽수는 등은 굽어도 주변을 배려하는 것이 많다. 특히 절집을 둘러싸고 제비 둥지처럼 품고 있는 주변의 산릉에는 수백 년 아름드리 활엽수들이 허리를 굽히고 자라며 사찰 공간을 성스럽게 꾸며주고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들이 굽어 자라는 게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수십 년 수백 년 바람을 맞으며 중력과 햇빛과 타협한 모습이다. 환경과 어울리는 멋들어진 춤사위다. 지난해 마지막 날 오대산 중대암과 적멸보궁, 비로봉, 상왕봉, 북대암을 거닐며 눈옷을 입은 고목들이 펼치는 성스러운 공연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오랜 세월 무수한 새순들이 자라며 어느 방향으로나 춤사위를 펼칠 수 있었을 나무는 왜 유독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고목의 춤사위는 사람이 느끼는 시간과 규모가 다르다. 사람은 춤사위를 순간순간 너울너울 펼치며 생생한 아름다움을 역동적으로 보여주지만, 나무는 새순들이 자라다가 죽고 녹다가 얼어붙어 수백 년의 시간을 응결해 숭고한 아름다움을 장엄하게 보여준다. 나무의 모습은 새순들이 자라고 죽고 다시 자라며 유구한 서사시를 써 내려간 것이다.
나무는 다른 나무와 자리를 공유하고 여러 동물과 함께 살아내며, 여름철 비바람과 천둥 번개, 겨울철 눈보라, 차고 건조한 북서풍, 봄기운의 따뜻함과 가을 단풍의 황홀함, 언젠가 지나갔을 산불의 흔적까지 도도하게 응축해 수백 년 세월을 말없이 품고 있다. 이런 넉넉한 품에는 바람의 마루와 골 사이에 꽃 피고 열매 맺은 흔적이 아롱져 있고, 여명과 황혼 사이에 새 날개의 떨림과 함께 다가온 날카로운 발톱, 뾰족한 부리에 살갗을 내어준 경험도 새겨져 있다. 이 순간 인간은 소나무와 잡목, 큰 나무와 작은 나무를 차별하고 60세 80세 따지며 한 해라도 더 살려고 조바심을 낸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자. 나뭇가지 사이로 부는 바람에서 자연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내가 태어나서 60년 동안 배운 능력일까? 적어도 600만 년 인류의 진화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나무 열매가 달아서 먹기 좋다는 것은 오로지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습득한 것일까? 적어도 이 나무와 함께 살아온 동물의 진화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나무의 조상과 인류의 조상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 진화론을 공부한 우리는 그럼 나의 나이를 얼마로 잡아야 할까? 나무나 내가 물을 찾는 습성은 이미 40억 년 전 원시 생물의 능력을 공유한 증거라면 나무와 인류는 46억 년 지구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나무와 우리 인간만이 아니라 이 숲에 있는 모든 생물은 지구의 역사를 공유하며 살아온 삶의 친구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돌도 물도 따돌릴 수는 없다. 생물이 물질과 에너지를 주고받는 것은 원소를 주고받으며 일어나는 일인데 이 원소는 돌과 물에서 온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힘은 들숨과 날숨에서 일어나는데, 이 힘은 우주에서 별이 폭발할 때 생성된 철분이 운반해준다. 나의 삶과 나무의 삶에는 우주의 전 역사가 필요했다. 우리는 모두 600만 년, 40억 년, 137억 년을 지금 여기서 펼쳐내는 중이다. 나 혼자 몇 년 더 살 욕심을 부릴 것이 아니라 이들과 함께 잘 살아갈 길을 알아내자.
신준환
서울대학교 산림자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립수목원 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동양대 산림비즈니스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다시, 나무를 보다』, 『나무의 일생, 사람의 마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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