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 문학 속의
사상과 진면목
정찬주
소설가
1.
사진첩을 펼치면서 보니 오래된 법정 스님 사진이 눈에 띈다. 내 나이 34세 때 스님을 불일암에서 뵙고 난 뒤 송광사 도성당 앞에서 찍은 1985년 여름날의 기념사진이다. 당시 나는 샘터사에 근무하면서 스님의 산문집 편집 담당자였으므로 스님께 용무가 있어서 내려갔던 것 같다. 밀짚모자를 쓰신 스님은 아마도 54세쯤 되셨을 것이다. 그때까지 스님은 상좌를 받지 않으셨다. 내게 고백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부처님께서 세납 55세에 아난다를 상좌로 허락하셨으니 부처님보다 먼저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긴, 서 있는 자기 자리에서 스님의 가풍을 받들고 실천하면 될 일이지 그 밖의 형식은 군더더기일지 모른다. 상좌 하나에 지옥 하나라는 말이 불가에 있지 않은가. 나는 스님을 뵌 지 몇 년 후에야 불일암으로 내려가 하룻밤을 잤다. 다음 날은 단옷날이었다. 하룻밤 잔 뒤 아침에 스님께 삼배를 올리고 나서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받았다. ‘저잣거리에 살되 물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스님께서는 새벽에 쓰신 계첩도 내미셨다. 그뿐만 아니라 계를 받는 공덕을 “계는 신호등과 같은 것이다. 길을 잘못 들면 불이 켜지는 신호등 역할을 해준다”라는 요지의 법문을 해주셨다. 이후 나는 스님의 유발상좌가 되었다.
나는 스님의 산문집 10여 권을 만들었다. 나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스님의 글이 곧 법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스님의 산문집이 왜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 스님께 여쭈었다. 서울 성북동 길상사 행지실에서였다.
“스님, 스님의 산문집을 10여 권을 만들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독자들이 스님 책을 사랑하는 이유는 스님의 시적 감성이나 현실을 보는 예각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허허, 그래요?”
“스님 글에는 일관된 사상이 있습니다. 그 사상에 공감해 독자들이 스님 책을 꾸준히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스님 사상이라면 인간은 물론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등 유무정물(有無情物) 생명 가치가 같다는 생명 중심 사상인 것 같습니다.”
“무염 거사, 서양이 인간 중심이라면 동양의 불교는 생명 중심의 진리지요.”
이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지금도 엊그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2.
스님은 수행자인가? 수필가인가?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지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스님은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서 글을 발표했을 뿐이지 본업은 집필이 아니라 수행이었다. 하루에 글 쓰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혼자 예불하시고, 차를 마시고, 손수 끼니를 해결하시고, 채마밭을 가꾸시고, 좌선하시고, 선어록 같은 책을 읽으시고, 해제 때는 만행하는 등 보통 스님의 일상을 조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스님의 진면목을 이해하려면 ‘스님의 글’이라는 방편을 끌어올 수밖에 없다. 내 생각이지만 스님의 면목을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나는 『법정 스님의 뒷모습』이나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 『법정 스님 인생응원가』 등의 산문집을 통해서 스님의 면목을 헤아려보기도 했다.
첫 번째는 스님은 철저하게 산승(山僧)으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자연주의자로 사셨다는 점이다. 물론 봉은사 다래헌 시절에 함석헌 선생 등과 반독재 투쟁을 하신 경험이 있지만 “그게 내 본분은 아니었지만 불이 났으니 소방관 심정으로 가담했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스님께서는 수행자답지 않게 마음속에 증오가 싹트고 있음을 알고 1975년에 서울에서 불일암으로 내려와버렸던 것이다. 이후 스님은 산을 떠나신 적이 거의 없었다. 길상사를 창건하시고 나서도 살아생전에는 단 하룻밤도 주무시지 않고 강원도 수류산방으로 가셨다. ‘살아생전’이란 조건을 단 것은 스님께서 임종하신 뒤 단 하루 길상사에 머무셨기 때문이다.
아무튼 산승인 스님의 글은 깊은 산의 메아리처럼 울림이 크다. 저물녘에 눕는 산그림자같이 여운이 길다. 산이 품고 있는 오래된 침묵에 응답하는 메아리 같다. 이와 같은 스님의 글을 생각나는 대로 옮겨본다.
‘숲에는 질서와 휴식이, 그리고 고요와 평화가 있다. 숲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안개와 구름, 달빛을 받아들이고, 새와 짐승들에게는 깃들일 보금자리를 베풀어준다. 숲은 거부하지 않는다. 자신을 할퀴는 폭풍우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이런 것이 숲이 지니고 있는 덕(德)이다.’
‘산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산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산은 곧 커다란 생명체요, 시들지 않는 영원한 품속이다. 산에는 꽃이 피고 꽃이 지는 일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시가 있고, 음악이 있고, 사상이 있고, 종교가 있다.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나 종교가 벽돌과 시멘트로 된 교실에서가 아니라 때 묻지 않은 자연의 품속에서 움텄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마지막으로 기댈 데는 자연이다. 자연은 인간 존재와 격리된 별개의 세계가 아니다. 크게 보면 우주 자체가 커다란 생명체요, 자연은 생명체의 본질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의 한 부분이다. 우리가 커다란 우주 생명체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자연을 함부로 망가뜨릴 수 없다. 동양의 전통적인 생각 속에서는 커다란 산이라도 하나의 생명체로 여겼다. 그래서 등산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입산, 산에 들어간다고 했지 산에 오른다고 감히 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스님의 모든 글을 관통하는 그물코가 있다면 생명 중심 사상이다. 스님은 생명 중심 사상을 일관되게 풀어놓으셨다. 스님의 여러 산문집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람과 동물의 업에 따라 비록 그 생김새는 다르다 할지라도 살려고 하는 생명 그 자체는 조금도 다를 바 없다. 한쪽이 약하다고 해서 죽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사람보다 훨씬 교활하고 힘센 짐승이 그의 식욕을 채우기 위해, 그의 손버릇 때문에 우리의 귀여운 자녀들을 앗아간다고 생각해보라. 우리는 얼마나 원통하고 분할 것인가. 목숨은 수단이 될 수 없다. 그 자체가 온전한 목적이다. 단 하나밖에 없는 절대 가치이다.”
“이 세상은 사람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건 보이지 않건 혹은 귀에 들리거나 들리지 않거나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생명들이 한데 어울려 우주적인 생명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런 존재와 조화는 따뜻한 사랑의 눈으로 보아야만 찾아낼 수 있다. 한 생명의 뿌리에서 나누어진 지체라는 대등한 입장에서 보아야지, 사람 중심으로 보려 하거나 인간 우위의 눈으로 보려 한다면 눈을 뜨고도 볼 수 없다. 현대인의 맹목은 바로 이 자기 중심의 오만에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누구나 익히 아는 스님의 무소유 사상이다. 스님의 무소유 사상은 스승인 효봉 스님을 시봉하면서 마음에 사무쳤다고 전해진다. 효봉 스님이 “걸레를 짤 때도 걸레가 찢어지니 꽉 짜지 말고, 비누도 조각이 완전히 다 녹아 없어질 때까지 쓰라”고 당부하셨다고 한다. 비누가 닳아서 조각났을 때 스님께서 구례장에 나가 새 비누를 사려고 하자 그런 당부를 하셨다는 것이다. 스님께서는 내게 이런 말씀도 하셨다.
“차를 즐겨 마시기 때문인지 다기를 좋아하지요. 그런데 누가 다기 세트를 또 선물해서 두 벌이 됐어요. 두 벌을 갖고 보니 한 벌을 가지고 있을 때보다 살뜰함과 고마움이 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선물한 이에게는 미안했지만 다기 세트 한 벌을 다른 이에게 주어버렸지요.”
이를테면 우리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가지는 게 무소유라는 것이었다. 하나면 족하지 둘은 군더더기라는 말씀이었다. 한편 ‘무소유’란 개념을 스님께서 처음으로 주창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역시 스님께 들은 말씀이다.
“현대로 올수록 사람들은 ‘소유’를 강요하는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고픈 열망을 갖게 된 것 같아요. 내가 『무소유』란 책을 낼 때는 ‘무소유’란 개념이 없었지요. 또 ‘무소유’를 정신적인 가치로 알아주지도 않았어요. 책 제목을 지을 때 출판사 사장이 난색을 표했는데 내가 우겨서 정한 제목이었지요.”
3.
스님은 말씀하기를 “아무리 위대한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도 한 분이면 족하다”고 하셨다. 스님은 무엇에 의지하고 비교하면서 살기보다는 자주적인 삶, 자기다운 꽃을 피우라고 스님의 여러 산문집에 남겼다.
‘풀과 나무들은 저마다 자기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 그 누구도 닮으려 하지 않는다. 풀이 지닌 특성과 나무가 지닌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눈부신 조화를 이루고 있다. 풀과 나무들은 있는 그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생명의 신비를 꽃 피운다.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진달래는 진달래답게 피고, 민들레는 민들레답게 피면 된다. 남과 비교하면 불행해진다.’
위에서 열거한 스님의 여러 면목들이 바로 스님의 가풍이 아닐까. 물론 종교 간의 대화나 다선일여(茶禪一如)의 면모, 다음 세대를 위한 불경의 한글화 등 스님이 지향하는 바는 많았지만 몇 가지만 예로 든 것이다. 나는 중국의 백장선, 조주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법정선(法頂禪)도 있다고 믿는다. 선(禪)이란 누구를 닮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독창적인 삶과 활발발한 역동성을 뜻하기에 더욱 그렇다.
정찬주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고, 국어교사로 교단에 섰다가 『월간문학』 등에서 편집자의 삶을 시작했으며, 십수 년간 샘터사 편집자로 법정 스님 책들을 만들면서 법정 스님에게서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받았다. 2002년부터는 전남 화순에 산방 이불재(耳佛齋)를 지어서 텃밭을 일구며 집필에만 전념하고 있다. 장편소설 『산은 산 물은 물』, 『소설 무소유』, 『이순신의 7년』 등을 비롯해 산문집 『암자로 가는 길』, 『선방 가는 길』, 『법정스님의 인생응원가』 등과 동화 『마음을 담는 그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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