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 정암사 적멸보궁 | 한국의 수행처 순례|5대 적멸보궁

붓다의 정골사리를 품고 있는
정암사 수마노탑


태백산 정암사 적멸보궁


강원도 정선에 자리한 태백산 정암사. 자장 스님이 선덕여왕과 함께 부처님의 율법과 가르침 그리고 문수보살 신앙을 펼치며 평생을 매진하다 입적한 곳이다.
지금도 아홉 구비를 돌고 돌아야 당도할 수 있는 강원도 두메산골 정선은 산이 성벽처럼 둘러싸여 있어 여전히 산은 높고 물은 맑아 봄부터 가을까지 각종 야생화가 피고 지며 노래하는 매우 아름다운 곳입니다. 오랜 옛날에는 남한강의 상류인 아우라지 물길을 따라 뗏목을 이용해 목재를 운반하던 중요한 나루터일 때도 있었고 석탄 산업과 더불어 나무와 물과 집이 온통 검댕을 뒤집어쓰고 있을 때도 있었으나 태백산 정암사는 구절양장(九切羊腸)처럼 구불구불 돌아치는 물굽이를 끼고 1,400여 년 동안 변함없이 붓다의 정골사리를 품고 있는 우리나라의 5대 적멸보궁 가운데 하나입니다.

정암사를 가려면 정선 사북에서 만항재를 향해 오르거나, 반대편인 영월 상동에서 만항재를 넘어야 하는데 해발 1,330m의 만항재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1,573m의 함백산과 1,567m의 태백산이 한눈에 들어와 마치 내 손안에 모두를 거머쥘 듯한 대 파노라마의 장관이 펼쳐집니다. 만약 수도권에서 떠난다면 고속도로를 타고 제천을 경유하게 되며, 사북과 고한을 거쳐 414번 지방도에 접어들어 달리다 보면 왼쪽으로 태백의 산천초목이 온갖 푸르름으로 자아내고 있는 천년의 고찰 정암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태백산 정암사는 비교적 뚜렷한 창건주와 창건 연기가 확인되는 사찰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정암사의 역사적 위상과 신앙적 위치를 상징하는 수마노탑에서 1972년에 발견된 5매(枚)의 탑지석(塔誌石)은 신라로부터 고려와 조선을 이어가는 동안 텅 비어버린 것만 같은 공백의 역사를 보다 세밀하게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탑지석이란 탑의 건립 이유, 수리 기록 등을 적어 탑 안에 넣어두는 돌입니다. 현존하는 석탑은 2,000여 기에 달하지만 경주 불국사 석가탑(국보 제21호),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탑의 고유한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고, 더구나 한 탑에서 이렇게 시기를 달리하는 탑지석이 5매나 발견된 사례는 수마노탑이 거의 유일하다고 하니 적멸보궁을 아래로 굽어보고 있는 수마노탑을 찾는 5대 적멸보궁 순례는 그 어느 곳보다 더욱 특별한 감흥을 자아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장은 원녕사에 머물면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다음 칡덩굴이 우거진 곳에 이르러 절을 짓고 석남원(石南院) 또는 갈래사(葛來寺)라고 했다가 후에 정암사로 했다고 합니다. 갈래사라고 하는 이름은 탑을 한 곳에 세웠는데 무너지고 자꾸 또 무너져 정성으로 기도했더니 칡이 세 줄기가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과 적멸보궁이 있는 자리에서 멈춰 그 자리에 탑과 본당을 세웠으므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국보로 승격 지정된 수마노탑
수마노탑은 정암사 자체를 상징하는 대표적 문화유산입니다. 특히 2020년 보물(제410호)에서 국보(제332호)로 승격 지정되는 영예를 안았는데 수마노탑에 관한 일화가 발견된 탑지석 제4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643년 문수보살은 자장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대의 나라에 인연이 있는 곳 중에 삼재(三災)가 닿지 않는 명승지가 있을 것이니, 그곳에 탑을 세우고 이것들을 안치하시오.”

자장율사가 바다를 건너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당나라의 여러 승려들이 “나라의 귀중한 보물을 어찌 해외의 작은 나라로 보낼 수 있겠는가?” 하고는, 병사들을 동원해 그것들을 빼앗으려 했다. 자장이 바닷가로 나가서 그것을 용왕에게 전하니, 용왕이 받아들고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 영남의 울산군(蔚山郡) 포구에 내려주면서 마노석과 함께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자장에게 돌려주었다. 자장은 이것들을 받아서 태백산 아래 문수보살이 가르쳐준 갈반지(葛盤地)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고 수마노탑이라 이름했다. 탑 아래쪽에 향화(香火)를 올리는 법당을 하나 짓고, ‘정암(定岩, 淨巖)’이라고 이름 지었다. (탑지석 제4석의 내용, 1713년 作)

2020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 지정된 정암사 수마노탑. 수마노탑은 현존하는 적멸보궁 가운데 설악산 봉정암과 함께 석탑을 이용해 보궁을 형성한 사례로 주목받는 곳이다


수마노탑은 모전 석탑 양식의 탑입니다. 모전(模塼)이라고 하는 것은 석재를 벽돌 형태로 가공해 축조한 석탑을 말하는데 마노석을 뜻하는 ‘마노탑’ 앞에 왜 물을 의미하는 물 수(水)자가 붙었을까요? 그것은 자장이 귀국할 때 서해 용왕이 자장의 도력에 감화해서 준 마노석으로 탑을 쌓았고, 물길을 따라 마노를 가져왔다고 해서 물 ‘水’ 자를 앞에 붙여 ‘수마노탑(水瑪瑙塔)’이라 불렀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암사와 수마노탑은 현존하는 적멸보궁 가운데 설악산 봉정암과 함께 석탑을 이용해 보궁을 형성한 사례로 주목받는 곳입니다.

특히 정암사는 자장이 선덕여왕과 함께 부처님의 율법과 가르침 그리고 문수보살 신앙을 기초로 해 해동의 나라 신라에서 여법한 불국토 건설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매진하다 입적한 바로 그곳입니다. 정암사 사찰 경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수마노탑! 이곳에서 자장을 비롯한 신라와 고려와 조선을 관통하는 수많은 수행자들과 함께 천년 동안 흐르는 적멸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한 방울의 맑은 정화수를 가슴에 가득 담는 순례 여행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여행과도 견줄 수 없는 가장 값진 마음의 여행입니다.

글과 사진|오서암
농부 작가로 활동하며 ‘자비를 나르는 수레꾼’ 봉사팀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마흔여덟에 식칼을 든 남자』가 있고, 엮은 책으로 무여선사의 『쉬고, 쉬고 또 쉬고』, 지상 스님의 『꽃은 피고 꽃은 지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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