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 기도 | 살며 생각하며

살며 생각하며


입시 기도


박명희 

소설가



초등학교 3,4학년 때쯤 할머니를 따라 모악산에 있는 절에 간 적이 있었다. 산 중턱에 있는 작은 절이었다. 설이 지나고 초사흗날이었다. 산에 하얀 눈꽃이 아름다웠다.  절은 내가 이제까지 본 중 가장 작았다.  

할머니는 지프차에 쌀과 보리, 콩, 팥 등을 공양물로 실었고 심지어 담배까지 싣고 가셨다. 차가 닿는 곳까지 가면 절에서 머슴이 지게를 지고 내려와 할머니를 기다리고 계셨다. 

산길을 꽤 오래 올라갔다. 머슴이 절에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금산사에 가보았다고 대답했다. 금산사에 계신 부처님은 엄청 크셨다.

“너는 굉장히 큰 부처님을 봤구나.”

얼굴이 세모진 머슴은 작은 눈을 크게 떴다.

달성암으로 기억하는 절에서 화주와 스님이 우리를 반겨주셨다. 화주의 아들이 주지 스님이셨으니 대처승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나의 오빠에게 화주를 어머니라 부르라고 강요했는데, 이유는 오빠를 절에 팔았다고 했다. 할머니가 장손인 오빠에게 행운이 오라고 하신 일일 것이다.

대웅전에는 인형만 한 부처님이 계셨다.

나는 스님이 염불을 하는 동안 부처님께 할머니를 따라 절을 잘해서 칭찬을 많이 받았다.

몇 년 후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더 이상 달성암에 가지 못했다.

아들의 대학 입시가 다가오자 맨 처음 든 생각이 기도였다. 절대자인 신에게 매달려야 했다. 나는 그때까지 종교가 없었다. 어린 날 외할머니가 섬기던 삼신할미부터 떠올랐다. 내 어머니는 가족들 생일이면 안방 윗목에 팥떡을 시루 채 올려놓고 가족들의 행운을 빌었다. 나는 뒤에서 히죽히죽 웃으면서도 할머니나 어머니의 뒷모습이 자아내는 경건하고 간절한 몸짓에서 투명하신 신이 그 방 어디쯤에 계실지도 모른다는 경외감에 뒷목이 뻣뻣해지곤 했다. 

나는 미신이라고 비웃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속절없이 그리워졌다. 아니면 시골 동네 어귀 당산나무 앞이나 성황당에서 어렸을 때처럼 소원을 빌고 싶었다. 그리고 보니 장독대에 정화수 떠놓고 오빠의 중학교 입시를 빌던 어머니의 지혜를 알 것도 같았다. 조상들의 숱한 기원과 한을 담은 장승이나 성황당을 미신이라고 단정하고 주저 없이 허물어버린 현대인들의 과학 정신이 오히려 어설펐다. 마침내 신은 내가 내딛는 걸음 안에까지 존재했고, 내 일상은 기도의 연속이었다. 결국 집 가까이 있는 절에 친구를 따라갔다. 하찮은 난초 한 포기를 기를 때에도 물 주는 사람이 마음을 써주면 더 실하게 크지 않느냐고, 자식에게 물 한 그릇 떠먹일 때도 엄마 마음에 정성이 깃들어 있을 때와 무심할 때가 다른 거라고, 친구가 말해주었다.  

그러나 대학 입시 100일 기도가 열리는 절에 가보니 자식에게 정성을 드리는 어머니들이 너무 많았다. 고요한 산사에서 범종 소리 은은하게 울리고 스님의 목탁 소리가 영혼을 맑게 깨워주는, 그런 절에서 비손을 하고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는 분위기는 어디서고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많은 어머니들이 찾아와 부처님께 공을 들이고 있으니 이제야 나는 감히 부처님께 행운을 달라고 청할 자격이 없는 건 아닌가, 겁도 나고 한숨도 나왔다. 그리고 보니 기도에도 치열한 경쟁이 있었던 것이다. 

절 마당에 서 있는 석탑에서부터 기도 경쟁은 시작되었다. 그곳 제단 앞에는 수백 개의 촛불들이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며 눈물 같은 촛농을 뚝뚝 떨어뜨리다가 타오르지도 못하고 기어이 꺼져버렸다. 제단 위에는 불타다 만 값비싼 초들이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탑돌이를 하는 신도들이 봉헌해놓은 쌀 봉지가 눈에 띄었다. 한 떼의 참새들이 몰려와 잔칫상이라도 받은 듯 쌀 봉지 속에 아예 둥지를 틀고 마음껏 쪼아 먹고 있었다. 

법당 어디에도 발을 디디고 들어설 틈이 없었다. 꼭 자리 하나를 맡아야 자기 자식이 갈 대학 한 자리가 맡아지는 것처럼 지악스러운 몸짓이었다. 방석 하나를 야무지게 붙잡고 절하는 사람들 사이사이를 재빠르게 비집고 들어가면서, 옆 사람과 부딪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엉덩이부터 들이미는 신도들의 몸짓은 흉내 내기도 어려웠다. 나는 대웅전 앞 댓돌에 서서 부처님을 올려다보았다. 천 개의 눈으로 세상을 비춰보시고 천 개의 손으로 중생의 고통을 멸하신다는 부처님의 눈에 내 자식만 무조건 잘되게 해달라고 체면 없이 매달리러 온 나를 부처님은 어떻게 보실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종교가 무속신앙과 달리 인간에게 성인들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자비를 베풀고 자신을 청정하게 닦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신도들 대부분이 부처님 앞에 자동인형처럼 절을 하면서 자기 위안을 삼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진 나는 쑥스럽고 민망해서 부처님께 감히 발원을 올릴 수 없었다.

문득 어느 큰스님께서 책에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현대 사회는 더 이상 종교에서 기적을 구하는 시대가 아니다. 다양하게 변화하는 과학의 시대에서 종교의 역할은 개인의 정신 수양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내 기도에 대한 응답에 관계없이 신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 달리 말하면 편안하게 체념할 수 있는 마음이 종교의 효험일 것이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발원기도를 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곧 터질 풍선에 바람을 계속 불어넣고 있는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을 견딜망정 아직은 희망을 갖고 싶었다. 

절을 나오니 가파른 산 아래로 두꺼운 얼음장 같은 하늘에 누런 해가 힘없이 박혀 있고 산비탈에는 겨울나무들이 추위에 떨고 있었다. 절 아랫동네에서 회오리쳐온 세찬 바람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울음을 터뜨릴 곳을 찾아 헤매었던 듯, 나뭇가지 사이로 힘겹게 앓는 소리를 냈다.

법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신도들의 물결을 따라 산을 내려가며, 어떤 외국 잡지 기자가 쓴 한국 기행문 중 한 구절이 생각났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은 한국인의 종교다.”

한숨 같은 바람 소리가 산 밑을 돈다. 더 진한 어둠이 하늘을 덮으면 별은 더욱 반짝일 것이다.

어릴 적 보았던 모악산 달성암의 별은 더욱 반짝일 것이다.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박명희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문학사상』에 소설 「별의 주소」로 등단했다. 제34회 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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