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共生)의 윤리 공업(共業)과 공보(共報) | 유식이란 무엇인가

공생(共生)의 윤리 

공업(共業)과 공보(共報)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불교의 인과응보, 개별 업의 원리인가?
불교에서의 업보(業報)의 원리는 중생이 몸이나 입이나 뜻으로서 선업(善業)이나 악업(惡業)을 지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락과(樂果)나 고과(苦果)의 보(報)를 받는다는 일종의 인과응보의 법칙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연과학이 말하는 물리적 인과법칙은 당연히 타당한 객관적 법칙이라고 받아들이지만, 불교가 말하는 선악의 윤리성과 고락의 심리까지도 포괄하는 업보의 원리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럴까?

불교의 업보의 원리를 각각의 개별자가 짓는 개별 업에 내포된 원리라고 간주하는 한, 오늘날 그런 업보의 원리를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고 본다. 말하자면 현재 삶에서 누군가 느끼는 고통이나 즐거움을 그의 현생 내지 전생에서의 개인적 업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우리는 적절하지 않다고 여긴다. 출생 환경에서부터 비롯되는 삶의 고통이나 즐거움을 그 개인이 전생에 지은 악업 또는 선업의 결과라고 간주하거나, 일상의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불운이나 행운을 그 개인이 행한 지난날의 악한 행위 또는 선한 행위의 보라고 간주한다면, 요즘 누가 그것을 타당하다고 받아들이겠는가?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가난 속에 태어난 어린아이가 기아로 죽어가는 것을 그 아이의 전생의 업 때문이라고 말한다거나, 횡단보도를 걷다가 음주 차량에 치어 불구가 되는 것을 그 개인의 지난날의 업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정상이 아니라고 여길 것이다. 되물림한 풍족함을 누리며 즐거워하는 자를 보고 전생에 지은 복이 많아서라고 말한다거나, 많은 인명 피해가 난 대형 사고에서 홀로 살아남은 자에 대해 지난날 선업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이 또한 말이 안 된다고 여긴다. 그 외 나머지 사람의 고통을 악업으로 인한 죄과로 간주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든 타인에 대해서든 ‘현생에 또는 전생에 지은 죄가 있어서 ⋯, 쌓은 복이 많아서 ⋯ , 업보 때문에 ⋯’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대규모 기아는 기후 또는 사회 분열이나 부패 또는 내전과 연결되고, 삶의 고락은 부와 권력의 되물림과 크게 얽혀 있으며, 자연재해나 산업재해, 묻지마 범죄 등의 피해자는 정작 죄 없는 약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개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 즉 사회 권력이나 경제 체제 등 사회구조적 문제이지 고통받고 있는 개인에게 그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개인이 받는 고락을 전적으로 그 개인이 지은 과거 업의 결과로 간주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불교의 업보의 원리를 개별자의 업보의 논리로 해석하는 한, 불교는 현대 사회에서 통용되기 힘든 주장을 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불교가 말하는 업보의 원리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무아에 입각한 공업과 공보의 원리
석가모니의 기본 가르침은 무아(無我)다. 그러므로 불교의 업보 사상도 마땅히 그 무아에 입각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연결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업과 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는 “유업보 무작자(有業報 無作者)”이다. 불교는 처음부터 업보의 관계에 있어 인간이 개별적 자아로 따로 존재해서 홀로 업을 짓고 또 바로 그 개별적 자아가 홀로 그 보를 받는다는 것을 부정한다. 애당초 업을 짓고 보를 받는 작자가 개별적 자아로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아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단독적인 개별적 실체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연기적 존재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도 단독으로 일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모든 행위는 모두가 함께 짓는 공업(共業)이 된다. 누군가 소위 악을 범할 수 있는 것도 주변에서부터 그에게 쏟아진 냉대와 무관심과 무자비가 중연(衆緣)으로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고, 누군가 소위 선을 행할 수 있는 것도 그의 가족과 이웃과 사회의 격려와 도움과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것일 수 있다. 베풀기 위해서는 가져야 하고, 갖기 위해서는 누군가로부터 취해야 한다. 빈과 부, 고와 락, 선과 악은 그렇게 서로 얽혀 있다. 불교의 “유업보 무작자”는 그러한 얽힘 안에서 우리가 짓는 업은 개별자 단독의 업이 아니라 결국은 모두가 함께 짓는 공업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일체가 공업이기에 업으로 인해 일어나는 결과 또한 모두가 함께 받아야 할 공보(共報)다. 불교에서 아직까지 제대로 해명되지 않은 것이 바로 이 공보다. 무아이므로 공업이고, 공업이면 당연히 공보인데, 공보의 개념은 제기되지도 논의되지도 않았다. 공보는 공통의 보를 말한다. 선업과 악업이 우리가 모두 함께 짓는 업인 만큼 락과와 고과도 우리가 모두 함께 나누어야 할 모두의 몫, 공통의 몫인 것이다. 사회 전체의 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인 락과 고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받고 함께 감내해야 할 것이지, 누군가에게 락을 몰아주고 다른 누군가에게 고를 강요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고와 락의 나눔이 불공정한 사회라면, 그 속에서 내가 웃고 있는 것은 곧 다른 누군가가 나 대신 울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내가 행복해하고 있는 것은 곧 다른 누군가가 나 대신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현재 누군가 심하게 고통받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그의 개인적인 악업의 보를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전체가 함께 나누어야 할 고통을 대신 홀로 짊어지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는 일체 중생의 고를 함께 나누려는 보살,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하려는 예수일지도 모른다.

불교에서 이러한 공업과 공보의 원리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불교가 처음부터 무아를 주장했고, 무아는 곧 우리가 모두 표층의 현상적인 개별적 차별상 너머 심층에서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하나로 소통하는 하나의 마음, 일심(一心)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유식은 바로바로 이러한 심층의 한마음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밝힌다. 

심층 아뢰야식의 보편성
유식은 우리 각자의 표층 의식과 심층 마음을 구분해 논한다. 각자의 표층 의식인 제6의식이 자기 뜻대로 활용할 수 있는 정보의 양에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인간의 아뢰야식 안에 함장되고 있다가 ‘하나의 공통의 기세간’을 만드는 정보(종자)에는 그러한 차이가 없다. 각자의 아뢰야식이 만드는 기세간(물리세계)이 하나의 공통의 기세간일 수 있는 것은 기세간을 만드는 종자가 인간 모두에게 공통된 종자, 공종자(共種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각자의 마음에 어떻게 공종자가 심겨질 수 있는가? 여기에도 앞서 언급한 “업과 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는 “유업보 무작자”의 논리, 한마디로 무아의 논리가 적용된다. 즉 인간이 짓는 업은 개별 작자가 따로 있어서 짓는 업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짓는 업인 공업(共業)인 것이다. 바로 이 공업으로 인해서 각자의 마음 안에 공종자가 심겨지고, 그 공종자로 인해 그 결과 하나의 물리세계를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니까 내가 당신을 부르면 당신이 내 말소리를 듣고 대답할 수 있고, 당신이 나에게 빵을 건네주면 내가 그것을 받아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세계는 각자가 만들어내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는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의 공통의 기세간이 된다. 이는 곧 세계를 만들어내는 그 마음이 각자의 마음이면서 동시에 공종자를 함장한 보편적 마음, 하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아뢰야식 안의 공종자로 인해 하나의 공통의 기세간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각자의 아뢰야식이 각각으로 분리되고 폐쇄된 각자만의 식, 창이 없는 모나드, 유아론적 영혼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유식은 각자의 아뢰야식을 촛불의 빛에 비유해 설명한다. 촛불 100개가 한 공간에서 각자의 빛을 내면, 그 빛은 각각의 것으로 자타 분리되어 따로 있지 않고 모든 빛이 서로 스며들어 하나의 빛을 이루어 하나의 밝음이 유지된다. 그만큼 우리 각자의 아뢰야식은 서로 안에 서로가 스며들어 있어 서로 공명하면서 서로 소통하는 하나의 마음, 일심인 것이다. 

우리는 지각 대상인 세계는 하나이고, 그것을 지각하는 우리의 마음은 서로 다 다른 각자의 마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각된 세계의 하나는 그것을 지각하는 마음의 하나를 전제해야 성립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기세간이 하나인 것은, 그 기세간을 만들어내는 우리의 아뢰야식, 우리의 심층 마음이 각자의 마음이면서 또 동시에 하나의 마음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절대 평등성과 공생(共生)의 윤리 
각자의 아뢰야식은 근본에 있어 하나의 마음이며 따라서 하나의 기세간을 형성한다. 그러면서 그 기세간 안에 다시 각자 서로 다른 몸, 각자의 유근신(有根身)을 만들어낸다. 각자 자신의 유근신을 만들어내는 종자를 유식은 서로 다른 종자라는 의미에서 불공종자(不共種子)라고 부른다. 공업을 지어도 업을 짓는 순간 각자의 표층식의 차이로 인해 불공종자가 심겨지고, 그 결과 공통의 기세간 안에 각자 서로 다른 각각의 유근신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식이 강조하는 것은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각자의 유근신의 차이는 인간 간의 본질적 차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심층의 하나, 일심과 여래장의 본성, 모든 인간의 절대 평등성을 은폐하는 표층의 다양한 차별적 모습, 성(性)을 가리는 상(相)의 차이에 불과하다. 현상의 유근신을 자아라고 여기는 식이 바로 상에 매인 식, 아상(我相)과 아견(我見)의 식, 아애와 아만과 아집의 제7말나식이다.  이는 마치 꿈을 꾸면서 꿈속 자기를 진짜 자기인 줄 알고 집착하며 괴로워하는 것과 같다. 유식은 그 꿈에서 깨어나라고 말한다. 유근신의 아집을 벗어남이 곧 무아의 깨달음이며, 이 깨달음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심층 아뢰야식, 일심으로 자각하게 된다. 인간의 마음이 본래 상으로 채워지지 않은 빈 마음이되 허령하게 자신을 아는 공적영지의 마음, 본각(本覺)의 마음, 부처의 마음이다. 부처의 마음이란 점에서 인간은 모두 절대 평등의 존재다.  

그렇다고 불교가 단순히 각자의 몸인 유근신 내지 현상적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는 오히려 심층 한마음의 평등성이 표층 현상세계에 그대로 실현되기를 지향한다. 즉 우리 모두의 현상적 자아가 불성의 발현이기를 희망하고,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이 기세간이 그대로 불국토가 되기를 희망한다. 불교가 심층 한마음을 강조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현상의 차별상 너머 동일한 생명, 동일한 인권을 가진 절대 평등의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윤리는 현상세계 내 유근신들의 관계에서 성립하지만, 그 윤리의 이념은 현상 너머 심층 한마음의 절대 평등성 안에서 찾아진다.  

불교의 무아와 연기가 말해주는 바 우리는 심층에서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하나로 소통하고 있는 한마음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인드라망으로 묶여 있는 존재, 다 같이 공생공멸할 하나의 운명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따라야 할 윤리는 우리의 공업으로 인해 생겨나는 공보를 모두가 함께 나누는 그런 공생(共生)의 윤리이어야 한다. 너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고, 나의 슬픔이 곧 너의 슬픔이기 때문이다. 오늘 네가 처한 그 고통의 자리에 내일은 바로 내가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너와 나, 둘 간에 본질적 차이가 없으니, 둘이 둘이 아닌 무아이기 때문이다. 

•이번 호를 끝으로 한자경 교수의 <유식이란 무엇인가> 연재를 마칩니다.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서양 철학(칸트)을,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불교철학(유식)을 공부했다. 현재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칸트와 초월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 『유식무경: 유식 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불교철학과 현대 윤리의 만남』, 『대승기신론 강해』, 『심층마음의 연구』, 『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나는가』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철학의 원리로서의 자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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