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염불정진대회 참관기
김태겸
수필가
몇 년 전, 서울 조계사 옆에 있는 동산불교대학에 다닐 때였다. 하계 수련도 할 겸 강원도 건봉사에서 실시하는 염불정진대회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입재식은 건봉사 대웅전 앞마당에서 열렸다. 삼백 명 정도 모였을까? 전국염불만일회가 주최하는 행사였다. 대회 배경이 궁금했다. 신라 경덕왕 17년(758년)에 발징 화상이 염불만일회를 결성한 것이 효시였다. 명칭 그대로 염불을 1만 일 동안 지속해서 하는 모임이라고 했다. 1998년 8월 6일 전국염불만일회를 발원했다 하니 2025년 12월 21일이 되어야 회향하는 초장기 모임이었다. 이러한 모임은 불교가 박해를 받았던 조선시대에도 중단되지 않고 면면히 이어졌다는 말을 들었다.
건봉사 주지 스님이 법문을 했다. 수행법으로써 염불의 효과성을 강조하고 ‘나무아미타불’을 ‘나쁜 일은 사라지고 좋은 일이 오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부처님 가피력으로 실제로 좋은 일만 생길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염불정근이 시작되었다. 의식 단원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두드리는 북소리에맞추어 M 법사가 염불을 이끌기 시작했다. 소문에 듣던 대로 그의 염불 소리에는 혼이 배어 있었다. 따라 하지 않고는 못 배길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시간이 멎었다. 내가 염불인지 염불이 나인지 분별심을 잊었다. 명상에 깊이 빠져 있을 때와 같은 정적감이 찾아왔다. 그 시끄러운 염불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저녁 공양을 마친 후 대웅전 앞마당에서 축하 공연이 있었다. 특히 즐거웠던 프로그램은 P가 이끌었던 찬불가 시간이었다. 그녀는 오래전 유행했던 ‘쿵따리샤바라’에 자신이 작사한 찬불가를 얹었다.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 땐 염불 소릴 한번 크게 질러봐.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
가사도 재치가 있었지만 정작 재미있는 것은 안무였다. 남녀노소 함께 일어서서 그녀가 이끄는 대로 찬불가를 부르며 신나게 춤을 추었다. 그 순간만은 엄숙한 종교 모임이 아니었다. 그때 문득 느꼈다. 종교와 예술은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예술로 인해 종교는 한층 더 승화되고 있었다.
저녁 9시부터 천도재가 진행되었다. 참석자 전원이 촛불을 들고 대웅전 앞마당을 세 번 돈 후에 천도 발원을 시작했다. 마당에는 철근을 삼각뿔 모양으로 세워 관세음보살 그림을 여러 장 두르고 줄을 쳐서 영가 발원문을 매달았다. 재를 마친 후 의전 법사단이 행렬을 이루어 발원문을 소각하러 가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밤 11시부터 다시 염불 정진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J 스님이 염불을 이끌었다. J 스님의 염불 소리는 물이었다. “나무아미타불”을 외칠수록 정신은 더욱 맑아져갔다. 덕분에 졸음도 잊고 염불에 매진할 수 있었다.
염불을 마치고 나니 새벽 1시에 가까웠다. 다음 날을 위해 잠시 눈을 붙이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뒤척이다가 잠에 빠져들었다. 꿈결에 북소리를 들었다. 북소리는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벌써 5시가 넘었다. 숙소 문을 열고 나오니 밤새워 염불 정진을 한 사람들이 숙소 뒤쪽 적멸보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슬며시 행렬 끝부분에 따라붙었다.
적멸보궁 뒤에는 부처님 치아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 있다. 원래 통도사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왜군에 약탈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 사명대사가 왕의 사절로 일본에 건너가 이를 반환 받았다. 다른 사리는 통도사에 돌려주고 치아 사리 12과만 건봉사에 모셨다. 그러다가 1986년 도굴범에 의해 4과는 분실되고 현재 3과는 사리탑에, 5과는 대웅전 옆에 위치한 법당에 모셔져 있다.
아침 공양과 도량 청소를 마친 후 사리 친견을 위해 법당에 들어갔다. 치아 사리는 투명한 유리함 속에 십(十) 자 모양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밝은 조명과 사리를 담고 있는 금빛 그릇의 영향인지 진주색으로 영롱하게 빛났다.
사리 친견에 이어 안동일 전국염불만일회장의 법문이 있었다. 준비해왔던 법문을 제쳐두고 자신의 수행 방법을 소박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마지막 행사로 등공대에 올랐다. 등공대는 신라시대에 1차 염불만일회를 마친 스님과 신도들이 극락으로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는 성스러운 장소이다. 그곳 전망대 무대에서 보여준 바라춤과 헌공무는 이번 행사의 백미였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불교 수행을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현세에 복을 누리고자 함도 아니요, 죽어서 극락에 가고자 함도 아니었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곧 부처임을 깨닫고 싶을 뿐이었다. 비록 마음속 부처는 진애(塵埃)에 파묻혀 형상을 알아볼 수 없지만 부단한 수행을 통해 하나하나 씻어낸다면 언젠가는 부처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대회에 참석하면서 그동안 편견에 빠져 있었던 것 아닌가 하고 반성했다. 염불 수행은 단순해 내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영양의 균형을 맞출 수 있듯이 마음속 진애를 씻어내는 수행 방식도 다양해져야 하지 않을까. 진리는 단순함에 있는데. 1박 2일간 염불 정진을 마치고 나니 심신이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김태겸 『문학의 강』에 수필로 등단해 월간 『불교문화』와 격월간 『문학 수(秀)』 편집위원을 비롯해 서초문인협회 수필분과위원장 및 편집위원장, 국제PEN한국본부, 일현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초문학상을 수상했다. 수필집으로 『낭만가(街)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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