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대중이 피안에 이르도록 하는 절, 철원 화개산 도피안사

철원 화개산 도피안사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공학 박사


사람들이 강원도 철원을 비운의 땅이라고 이야기한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백마고지 등이 있는 곳인데다가 지금도 남북이 대치하며 총부리를 겨누는 긴장의 땅이다. 이곳 동송읍 관우리에 있는 도피안사(到彼岸寺)는 비무장지대와 접경한 긴장의 지역에 있다. 그래서 얼마 전만 해도 민간인이 자유롭게 출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지금은 긴장이 완화되고 사찰 운영도 군(軍)에서 불교 종단으로 돌아왔으며, 일반인이 자유로이 방문할 수 있다.

사부대중이 피안에 이르게 하는 절
도피안(到彼岸)은 ‘어리석고 미혹한 마음을 돌이켜 진리의 깨우침을 얻고 온갖 얽매임의 바다를 건너 이상세계에 도달하다’ 또는 ‘철조 불상이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에 이르렀다’라는 뜻이다. 산스크리트어인 파라미타(Paramita)를 음역한 것이 바라밀(波羅密) 또는 바라밀다(波羅密多)인데, 완성 또는 완전을 뜻한다. 이것을 다시 한역한 것이 피안이다. 피안은 미혹의 세계인 차안(此岸)과 상대되는 말이다. 따라서 도피안사는 피안에 이르는 절이고 달리 말하면 사부대중이 피안에 이르도록 하는 절이다.
도피안사는 마당이 좁다. 그래서 3층 석탑은 좁은 마당과 잘 어울린다.

작지만 넘쳐있는 곳
한반도 중앙에 있는 절이지만 규모는 매우 작다. 일주문·사천왕문·해탈문을 제외하면 건물의 수도 여섯 개밖에 되지 않고 절터도 넓지 않다. 그러나 피안이 갖추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여섯 개 건물도 오히려 넘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살린 일주문은 다른 건물들과는 비껴서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사천왕문이 보이는데, 사천왕문과 해탈문은 나란히 놓여 있다. 반면에 대웅전인 대적광전은 사천왕문과 해탈문을 일직선으로 놓고 보았을 때 오른쪽으로 약간 비껴서 있다.

사천왕문 옆에서 올려다보는 절은 건물들이 중첩돼 보여 단아하면서도 시각적으로는 웅장하다. 철원평야 한가운데 있어 사방은 논인데 그 논 한가운데 살포시 솟은 화개산 자락에 도피안사가 있다. 화개산은 지도에도 표시가 되지 않는 매우 낮은 산인데 구릉이라고 해도 될 만큼 작다. 하지만 이 작은 산에도 좌청룡 우백호가 확연하게 있고 그 사이에 도피안사가 자리를 틀고 앉았다.

해탈문 계단을 오르면 바로 대적광전의 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른쪽으로 돌아야 마당에 들어설 수 있다. 일주문 지나 있는 가람의 배치도를 보면 해탈문에서 계단을 올라 바로 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종각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도록 언제인가 단장한 것 같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식수대가 있다. 표주박으로 물을 한 바가지 들이켜야 피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 같다.

마당에 있는 3층 석탑은 소박하다. 키도 그리 크지 않다. 연꽃이 새겨진 기단과 네 귀퉁이를 올린 지붕돌이 석탑의 우아함을 더한다. 대적광전과 천불전은 단청을 입혔지만, 삼성각·설법전·무설전에는 단청이 없다. 도피안사는 여러 차례 불에 탔다가 중건되었는데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 그리된 것 같다. 예전에는 해탈문에도 단청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단청 없는 건물들은 도피안사라는 이름과 잘 어울린다. 피안은 공의 세계일진대 색깔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도선 국사가 창건하면서 조성한 철조비로자나 불좌상. 비로자나불의 광명이 온 누리에 비치기를 염원하는 뜻 같다.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 국사가 조성한 철불과 석탑
도피안사의 역사는 매우 깊다. 신라 경문왕 5년(865년) 도선 국사가 철원 지역 향도 1,500여 명과 함께 철불(鐵佛)을 조성하고 3층 석탑을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철불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도선 국사는 풍수지리의 대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영암에서 태어났고 경북 지방과 호남 지방에서 설법을 주로 전하던 스님이 이 먼 철원 땅에 절을 세운 이유가 궁금하다. 학자들은 스님이 풍수지리 중 ‘비보풍수(裨補風水)’의 대가였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비보풍수는 땅 기운이 약한 곳을 보완해 균형을 이루는 풍수 이론이다. 도피안사가 있는 화개산은 물 위에 떠 있는 연약한 연의 모습이므로 도선 국사가 발심해 철불과 석탑으로 산세의 허약함을 보충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비했다고 한다. 『유점사본말사지(柳岾寺本末寺誌)』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철조비로자나불을 조성해 철원 수정산 안양사에 봉안하러 가는 도중 불상이 사라졌는데 나중에 확인하니 지금의 도피안사 터에 불상이 안좌한 자세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암자를 짓고 불상을 모시고 800의 비보사찰(裨補寺刹) 중의 하나로 삼았다.”

도피안사를 창건하던 시기는 신라 말로 도처에서 군웅이 할거하던 격변기인데다 통일신라를 지배하는 화엄(華嚴) 사상이 달마 대사로부터 시작된 선(禪)이라는 신사조에 밀려날 때다. 821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도의 국사가 전한 선은 설악산에서 싹을 틔워 곧바로 전국으로 퍼져 나갔는데 태안사에서 혜철 국사가 동리산문을 열었다. 도피안사를 창건한 도선 국사는 혜철 국사의 제자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개척자였다.

부침을 겪으면서도 천 년 넘게 지속되는 이유
도피안사가 현대사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철원의 1,500여 향도들이 뭉쳐 도피안사를 만들었던 힘이 다시 뭉쳐 1919년 항일(抗日) 애국단의 이름으로 재현됐기 때문이다.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발족한 대한독립애국단의 강원도 지부가 바로 도피안사에서 결성식을 가진 철원애국단이다. 철원애국단은 스님 세 명을 비롯해 전도사 등 종교인과 연희전문학교 학생, 면서기, 목재상, 약재상 등 다양한 직업군이 참여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은 인물이 농민이었다. 이들이 결성한 대중 항일 조직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을 댔다.

1898년 봄 큰 화재로 사찰 건물이 모두 전소되어 재창건했다. 원래 광복 이후 도피안사 지역은 북한 땅이었는데 1950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다시 전소되었고 철조비로자나불상은 땅속에 묻혀 행방을 알지 못했다.

1959년 전방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육군 제15사단장 이명재 장군은 꿈에서 불상이 나타나 땅속에 묻혀 답답하다는 말을 들었다. 다음 날 이 장군이 전방 순찰을 나갔다가 갈증을 느껴 민가에 들렀는데 안주인이 바로 꿈속에서 불상과 함께 보았던 그 여인이었다. 이 장군이 꿈 이야기를 하자 여인은 소실되어 사라진 도피안사 터를 안내했고 그곳에서 땅속에 있던 철불을 찾았다. 그 자리에 철불을 보호하는 암자를 짓고 도피안사가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으므로 군승(軍僧)에 의해 관리되다가 1985년 조계종으로 이관되었다.

작은 절이 부침을 겪으면서도 천 년 넘게 지속되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 답이 도피안이라는 이름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종호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대학에서 공학 박사 학위와 과학 국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등에서 연구했다.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유네스코 선정 한국의 세계문화유산』(전 2권) 등 100여 권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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