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가지산 보림사
비자나무 숲길
들어가기 위한 절차로써 ‘노크’의 필요성이 붙을 자리가 없는 문. ‘이리 오너라’ 하는 따 위의 허세는 스스로에 대한 조롱으로 되돌려지는 문. 도둑일지라도 경계의 눈으로 주위를 살필 필요가 없는 문. 모름지기 절집의 문은 그러합니다. 개폐(開閉)는 집주인의 소관이 아니라 들고 나는 자의 몫일 따름입니다.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에 선 일주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애당초 닫는 기능이 없으니 ‘열려 있다’는 말도 객쩍은 표현입니다. 일주문의 개방성은 무차별과 포용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그 개방성은 절대적 자율을 전제합니다. 인과의 그물에 매이고 벗어나는 일 모두 저마다의 책임이라는 서릿발 같은 선언입니다. 또 그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 긍정이기도 합니다. 그 긍정의 자리에서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선(禪)의 정신이 태동했을 것입니다.
장흥의 보림사는 통일신라시대에 형성된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먼저 열린 절입니다. 일주문에 발을 들이면 보게 되는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이라 쓴 편액은 그 긍지의 표현일 것입니다.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근본 도량이었던 보림사는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3보림이라 일컬어졌습니다.
보림사의 시초는 원표(?~?, 신라의 스님)가 세운 암자였는데, 당나라 유학 후 염거화 상 문하에서 정진하던 보조(普照) 체징(體澄) 스님이 860년(헌안왕 4)에 이곳으로 와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선풍을 진작시킴으로써 한국 선종의 종가가 된 것입니다.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가람이었던 보림사는 6.25전쟁 때 모두 타 일주문과 사천 문만 남았습니다. 보통은 사천왕문이라 부르는 보림사 ‘사천문’의 사천왕상은 현존하는 것 가운데 가장 연대가 앞선다는 점에서 존재 의미가 특별합니다. 1780년에 쓴 공 덕기 현판에 1515년에 처음 만들었다고 밝혀져 있습니다.
사진│우태하(항공사진가), 글│윤제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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