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칠장사와 어사 박문수 | 사찰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안성 칠장사

어사 박문수와 나한전

그림 | 한생곤

암행어사 박문수, 불교와의 인연
설화 속 인물은 과거의 인물이지만 또한 현재 인물과 같으며, 설화는 다름 아닌 인간 이야기이다. 과거의 그때나 지금도 동일하다. 따라서 설화문학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현재와 미래에 ‘사람답게 사는 길과 그 길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암행어사’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박문수다. 그렇다면 실존 인물 박문수와 만화로, 드라마로, 소설로 알고 있는 암행어사 박문수는 과연 일치하는 삶을 살았을까? ‘암행어사 박문수’라는 설화 속 인물은 단순히 백성의 실태를 파악하는 직무 수행 업적보다는, 서민의 애환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이를 해결해줄 것 같은 백성의 로망이었다는 점에서 그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조선 후기 암행어사로 유명했던 박문수(1691~1756)는 태어날 때부터 불교와 인연이 있었다. 박문수의 아버지는 늦게까지 자식이 없자 아들을 낳겠다는 일념으로 100일 기도를 발원했다. 때마침 어떤 스님이 찾아와 말하기를, “기도는 절에서 하지 말고 집에서 문수보살을 생각하며 하라”고 했다. 그래서 99일 동안을 날마다 하인을 시장에 내보내 스님 한 분씩을 모셔오게 해서 공양을 올리며 기도를 했다. 100일째 되는 날, 정성스럽게 공양을 준비했으나 스님을 모시러 간 하인이 혼자 돌아왔다.

“어째서 스님을 안 모시고 너만 왔느냐?”
“스님이 한 분도 안 보입니다.”
“스님이 안 계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 좀 더 찾아볼 일이지.”
“한 분이 계시긴 했는데 좀 거북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그 스님이 문둥병 환자였다는 것이다. “병이 너무 깊어 몸 전체에서 고름이 뚝뚝 떨어지고, 턱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침이 줄줄 흐르는 스님이었습니다.” 그러자 박 어사의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스님을 모셔오라고 했지 누가 문둥이를 보라고 했느냐?” 결국 하인은 스님을 모셔왔고 정성껏 공양을 올렸다. 스님은 아무 말없이 공양을 받아먹었다. 박 어사 부부는 “이렇게 저희들이 마련한 공양을 받아주셔 감사합니다”라며 인사를 올렸다. 문둥병을 앓고 있던 스님은 고름을 뚝뚝 흘리며 밖으로 나갔다. 대문을 넘어서자 스님의 고름은 연꽃으로 변하며 문수보살의 모습을 한 채 하늘로 올라갔다. 박 어사 부부는 곧 새 생명을 잉태하게 되었고, 이름을 ‘박문수’로 지었다.

칠장사 나한전 유과 공양과 입시 기도
과거 때가 되자 박문수는 짐을 꾸려 한양으로 향했다. 이곳저곳에서 숙식을 하던 중 하루는 안성 칠장사에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이미 칠장사 나한전은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들이 기도를 많이 해 급제했다는 영험이 전해지던 유명 기도처였다. 박문수는 조심스럽게 어머니가 만들어준 조청 유과를 나한전에 올리며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이번 과거에 출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안성에 있는 칠장사 나한전은 암행어사 박문수가 올린 유과 공양 설화로 인해 3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입시를 앞둔 수험생 부모들이 찾는 도량이 되었다. 매년 가을 칠장사 앞마당에서는 '어사 박문수 전국 백일장'이 열리는 등 실패를 딛고 일어난 불굴의 정신으로 인해 박문수는 우리들 가슴속에 희망의 전도사로 자리하게 되었다.

기도를 마친 박문수는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칠장사의 나한인데 당신의 기도를 들어주기 위해 왔소.” 깜짝 놀란 박문수는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어떻게 저의 소원을 들어주시려는지요?” “며칠 후 그대가 한양에 도착해 과거를 볼 때 시제가 있을 것이요. 그 시제를 보여줄 터이니 잘 기억하시오.” 나한은 하얀 종이와 붓을 꺼내 시제를 명문장 7행으로 써 내려갔다. 그리고는 마지막 행은 스스로 완성하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깜짝 놀란 박문수는 잠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본 시제가 또렷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박문수는 한양에 도착했다. 드디어 과거 날, 시험을 치르는 성균관 과거장에서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시제가 내걸렸다. 시제 내용을 확인한 박문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이럴 수가! 며칠 전 칠장사 나한님이 꿈속에 일러준 시제가 그대로 나온 것이 아닌가!” 나한이 일러준 대로 일곱 문장을 적어 내려갔으나, 나머지 한 문장이 남았다. 고심 끝에 마지막 문장을 지어 제출한 박문수는, 결국 병과 진사과에서 영예의 장원 급제를 하게 되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칠장사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이다.

희망의 전도사, 어사 박문수
이미 25세, 28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을 한 박문수의 나이 32세 때였다. 물론 ‘몽중등과시’는 팩트라기보다 민간 전설에 가깝다. 극심한 기근과 탐관오리의 횡포로부터 자신을 구제해줄 목민관을 찾던 민초의 열망이, 암행어사 박문수에 관한 숱한 전설을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 당당히 장원급제한 박문수가, 이 전설 때문에 요행수의 덕을 본 것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지만 ‘진인사대천명’의 자세와 두 차례의 실패를 딛고 일어난 불굴의 정신을 간과할 수 없다. 혹여 꿈에서 시험문제를 미리 보았다 할지라도, 박문수는 급제할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던 것이다. 나한이 일곱 행을 알려주었다고는 하나, 그가 장원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적어낸 마지막 행 때문이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해 저무는 들녘 풍경을 묘사한 시의 마지막 행을 ‘더벅머리 초동이 풀피리를 불며 돌아간다(短髮樵童弄苖還)’라고 매듭짓고 있다. 피리 적(笛)이 아닌 풀피리 적(苖)을 씀으로써 시골의 운치를 살리는 동시에 시의 품격을 한층 높여 묘사하고 있다. 이 점이 장원을 하게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마지막 문장은 압권으로 평가받고 있다. 두 차례 낙방을 딛고 절치부심하며 시문을 갈고닦았기에 자신의 명문장으로 당당히 장원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성 칠장사 전경

돌아오는 길에도 박문수는 칠장사에 들러 유과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이후 박문수는 암행어사를 시작으로 병조정랑, 경상도 관찰사, 병조판서, 어영대장, 호조판서, 우참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목민관으로서의 명성을 날렸다. 3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유과 공양을 올린 박문수의 설화로 안성 칠장사 나한전은 입시를 앞둔 수험생 부모들로 북적이고, 또 매년 가을 칠장사 앞마당에서는 ‘어사 박문수 전국 백일장’이 열리고 있다. 이처럼 박문수는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희망의 전도사로 자리하고 있다.

백원기
동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평생교육원장을 맡고 있다. 『불교설화와 마음치유』,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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