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에 가면 간월암과 부석사를 가보십시오

세계는 한 송이 꽃
서산 도비산 부석사, 간월암


철새들의 ‘군무’를 보면 어렴풋하게나마 ‘생명의 본질’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사람들조차도 상태가 멀쩡할 때는 ‘생명체’로서의 자기 자신을 실감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할 뻔한 직후, 죽고 싶을 정도로 아플 때, 누군가의 어이없는 죽음을 목도하는 따위의 사태 앞에서나 잠깐 느끼고 말 따름입니다. ‘어머니 지구’, ‘모든 생명체는 연결돼 있다’, ‘인간과 자연은 한 몸이다’와 같은 생태 담론을 ‘나’의 ‘생존’ 문제로 인식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철새들의 군무를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집니다.


고래가 하늘을 납니다. 거대한 새가 세상의 모든 단맛을 차지한 듯한 태양을 삼킵니다. 금방이라도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를 쏟아낼 듯한 검은 구름이 저녁 하늘을 제집인 양 합니다. 겨울 천수만에서 철새들의 군무가 만들어내는 풍경입니다. 그 새들은 지난여름 시베리아에서 새끼를 낳고 기르다가 천수만에 오기까지 4,000km를 비행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을 다섯 번 왕복할 수 있는 거리, 지구 둘레의 10분의 1입니다. 강철보다 더 강한 ‘생명 의지’입니다. 그 의지의 근골을 키운 것은 시베리아의 여름 햇살, 그 의지를 발현시킨 것은 날갯짓의 부드러움입니다. ‘어머니 지구’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한다 해도 수사적 흥청거림이라고 비난받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 겨울, 도비산(島飛山) 부석사(浮石寺)에 가면, 모든 생명체는 연결돼 있고, 만물이 서로에게 스며들어 저마다의 꼴을 이룬 세계의 실상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부석사는 단순 소박이야말로 궁극의 기교임을 보여주는 절입니다. 큰 법당인 극락전 옆으로 막돌기단 위에 선 ‘심검당(尋劍堂)’과 ‘목룡장(牧龍莊)’이 그러합니다. 예전부터 스님네들은 이어진 두 건물의 형상이 ‘누운 소’를 닮았다고 하며 좋아했습니다. 심검당과 목룡장의 편액 글씨는 경허 스님이 썼습니다. 한때 경허(鏡虛, 1846~1912) 스님이 이곳에서 지혜의 검을 갈고, 인재를 길렀습니다. 그 제자 중의 한 분이 만공(滿空, 1871~1946) 스님입니다. 이 두 분의 체취를 느끼고 싶으면 절마당의 벤치에 앉아 서해(천수만)와 간척지를 내려다보면 됩니다. 산과 바다와 들판이 어떻게 서로에게 깃들어 있는지보입니다.


도비산의 맥이 흘러 바다와 맞닿은 곳에 간월암(看月庵)이 있습니다. 철새와 함께 천수만의 상징과 같은 곳으로, 만공 스님이 만년에 이곳을 중창하고 조국 독립을 발원하는 천일기도를 올렸습니다. 스님이 기도 회향을 한 지 사흘 만에 광복이 되었습니다. 다음 날 그 소식을 들은 만공 스님은 무궁화 꽃잎에 먹을 적셔 이렇게 썼습니다. ‘世界一花(세계일화)’.

‘세계는 한 송이 꽃’입니다. 도인의 눈에 비친 세계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왜 현실은 불쑥불쑥 지옥의 얼굴을 내미는지요. 우리 모두의 생명 의지가 저 새들의 날갯짓처럼 무구한 의지로 충만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살고자 하는 의지를 삶[生]에 바치지 않고 수단을 가리지 않는 ‘악착같이 살기’에 매몰하기 때문이겠지요.

사진│우태하(항공사진가), 글│윤제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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