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의 한계를 시험하는
타인과의 만남
『타인이라는 가능성』
윌 버킹엄 지음, 김하현 옮김, 어크로스 刊, 2022 |
10여 년 전 서울 시내 한 지하철역에서 길을 못 찾아 헤매고 있는 외국인을 도와준 적이 있다. 필리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였는데, 나는 그가 지하철 노선을 잘못 골라 탔다는 것을 알려주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자세히 길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친절한 사람은 처음 봤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더듬거리는 한국어로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현했다. 그는 자신이 한국에 처음 와서 너무 모르는 것이 많아 도움받을 사람이 필요하다며 내게 전화번호를 물어보았다. 워낙 그의 눈빛이 간절해 차마 외면할 수가 없어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가르쳐주면서도 ‘설마 전화를 하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의 절박함과 고마움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며칠 후 정말 전화가 왔다. 나는 당황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친구 K가 대경실색하며 전화를 받지 말라고 말렸다. “그 사람이 널 괴롭히면 어쩌려고 그래. 스토커일 수도 있어. 전화번호를 가르쳐주다니, 너 정말 조심성이 없구나. 순진한 너를 상대로 사기를 치려는 거면 어쩔 거야?” 나는 친구에게 한참 잔소리를 듣고, ‘정말 그런 나쁜 일이 내게 일어나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는 몇 번이나 전화를 했지만 나는 끝내 받지 않았다. 그가 낯선 남자이고, 나는 낯선 남자에 대한 두려움을 학습한 여자라는 사실이 그 통화를 끝내 거부하게 만들었다.
그 후로 몇 번 길 잃은 외국인을 도와주며, 그때마다 그 사람이 떠올랐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아 그는 아주 많이 상처받지 않았을까.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었으면 ‘당신을 돕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텐데, 나는 낯선 남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 간절한 구조 신호를 외면한 것이 아닐까. 나중에는 내 친구 K의 지나친 잔소리에 숨겨진 전제가 궁금해졌다. ‘낯선 타인은 무조건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에, K는 무조건 낯선 남자를 극도로 조심하는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 속에 숨은 세계관은 바로 타인의 호의나 좋은 점을 깡그리 무시하는 내가 타인이 될 때, 내가 이방인이 될 때를 전혀 전제하지 않은 세계관이 아닐까. 내가 이방인이 되어 외국으로 가면, 유일하게 기댈 곳은 타인의 무조건적인 친절이었다.
『타인이라는 가능성』은 팬데믹 이후 개개인의 고립과 두려움이 더욱 심화된 상태에서, 타인과의 연대와 신뢰감을 되살리는 길을 모색한다. 외국인 혐오증을 가리키는 ‘제노포비아’의 감성이 모든 낯선 존재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확대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제노포비아라는 공포는 낯선 이는 위험하다는 생각, 우리를 해코지할 수도 있고 모르는 질병을 퍼뜨릴 수도 있다는 공포에 근거한다. 그러나 그 공포는 절반만 맞다. 이방인은 아주 좋은 사람, 현인, 귀인일 수도 있다. 저자는 제노포비아에 맞서 필로제니아(philogenia)라는 아름다운 개념을 제시한다. 필로제니아는 미지의 존재와 연결되고자 하는 인간의 또 다른 오랜 욕망이다. 돌이켜보면 내 삶을 여기까지 오게 한 가장 고마운 원동력은 타인의 친절이었다. 낯선 사람에 대한 친절, 나를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람들의 위로 덕분에 죽음과 같은 우울의 늪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자 윌 버킹엄은 이 책을 쓰기 전 아내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고 한다.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의 빈자리 앞에서 어쩔 줄 모르던 윌에게 어느 날 암 연구 기금을 모으는 사람이 질문을 했다고 한다. 유방암에 대해 알고 있냐고. 윌은 자신도 모르게 아내가 암으로 죽었다는 것을 고백했고, 완전히 낯선 타인에게 아픔을 고백하는 자신에게 놀랐다. 그랬더니 낯선 사람이 윌을 와락 안아주었고, 아내를 잃은 윌은 낯선 사람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는 것이다. 낯선 타인끼리 만나 이토록 따스한 소통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의 고통’이라는 공통분모에 대한 깊은 이해 때문이 아니었을까. 부디 타인에게 더욱 마음을 열자. 환대를 해 더 많은 것을 얻는 쪽은 타인보다는 나 자신이다. 타인이 환대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은 친절과 다정함이지만, 우리가 타인을 환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한 더 크고 깊은 배움이므로. 타인이라는 미지의 위험 속에 우주라는 눈부신 가능성이 숨어 있으므로. 미지의 타자를 환대하는 일이야말로 불교의 자비심과 기독교의 이웃 사랑에 공통적으로 숨어 있는, 인류를 살리는 가장 아름다운 마음챙김의 비결이 아닐까.
정여울
작가. 저서로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월간정여울-똑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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