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내소사 청련암 | 암자 기행

작은 절, 큰 믿음|암자 기행


세상일 가운데 으뜸, 

앉아서 졸기

 

부안 내소사 청련암



청련암 가는 길은 내소사 가는 길과 온전히 겹칩니다. 당연히 전나무 숲길을 지나야 합니다. 이 길을 걸으면 허리를 곧추세우게 됩니다. 전나무의 수직적 염결성을 흉내라도 내보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굽은 내 허리를 새삼스럽게 의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전해줄 때 먼저 한 일이 있습니다. 인간을 직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전나무 숲을 지나면 활짝 하늘이 열리면서 벚나무 길이 천왕문으로 인도합니다. 천왕문에서 보는 내소사는 수직과 수평의 극적 조화를 보여줍니다. 도량 뒤로는 관음봉과 새봉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섰고, 도량 앞으로는 늙은 느티나무와 보리수가 서 있습니다. 그 사이에 전각들이 맞춤하게 앉았습니다. 전각의 지붕마루가 잔잔한 물결을 이룹니다. 그 물결을 따라 흐르는 풍경 소리는 조금도 다치지 않고 마당으로 흘러내립니다. 

서두를 것 없습니다. 오는 길은 재촉했다 할지라도 종종걸음으로 청련암을    오를 수는 없습니다. 먼저 내소사 부처님께 인사부터 드려야겠지요. 그래야 부처님의 미소가 어린 대웅보전의 꽃살문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내소사 대웅보전(보물 제291호)의 꽃살문은 솜씨를 뽐낸 흔적이 보이지 않아 좋습니다. 만약 이 문을 만든 소목장이 예술가연하며 ‘작품’을 만들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기교를 잊은 공력만이 닿을 수 있는 경지입니다. 모든 전각들이 그렇습니다. 기단은 물론 대웅보전의 초석도 꼭 필요한 만큼만 다듬은 자연석입니다. 내소사의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움이라는 척도 위로는 고개를 들지 않습니다. 넘보기 어려운 절제력입니다. 


내소사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청련암은 내소사보다 일찍 창건된 암자입니다. 백제 성왕 31년(553)에 초의 선사가 창건했고, 근세에 들어 능파 선사가 중수했으며, 현재의 모습은 1984년 혜산 스님이 해체 복원한 결과입니다. 

내소사 뒤로 봉래선원을 왼쪽에 두고 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을 1km쯤 오르면 청련암입니다. 제법 가파른 길입니다. 숨이 차오를 무렵 관음전 갈림길이 나옵니다. 관음전은 내려올 때 들르기로 하고, 이곳에서 20~30분 정도 산주름을 따라 굽이돌면 댓잎이 바람을 흔드는 소리가 들립니다. 대나무 숲에 가쁜 숨을 내려놓고 눈을 들면 가파른 산허리에 석축을 쌓아 터를 얻은 청련암이 좌정하고 있습니다. 세봉 동남쪽 기슭, 남쪽으로 시야가 활짝 열리는 곳입니다. 내소사와 곰소만, 바다 건너 선운산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청련암은 팔작지붕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정갈한 여염집 같은 인상의 인법당입니다. 청련암의 툇마루를 보면 내소사의 근세 선지식이었던 해안 스님(1901~1974)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늙은 스님네가 앉아서 조는 모습이 좋아 머리를 깎게 되었습니다.”

앉아서 졸기.

세상일 가운데 으뜸이 아닐까 싶습니다.

청련암에서라면 누구라도 그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윤제학, 사진|신병문


•이번 호를 끝으로 <작은 절, 큰 믿음-암자기행>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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