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무위사 | 공간이 마음을 움직인다

공간이 마음을 움직인다


소박해서 아름다운 공간


강진 무위사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공학 박사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봄을 맞는 남도에서도 강진은 특별하다. 강진은 북쪽에 월출산, 남쪽에 구강포와 바다, 거기에 수많은 섬들과 갯벌 그리고도 산과 하천, 평야를 고루 담아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풍광을 자랑하며 햇빛의 양도 많다. 강진만이 강진 깊숙이 들어와 있어 ㅅ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산하 이곳저곳이 매우 서정적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이 보인 서정도 그런 풍광에서 저절로 익어 나온 게 아닌가 싶다.

강진군 북쪽 끝자락 월출산 기슭에는 천 년 넘는 긴 세월을 품은 무위사(無爲寺)가 있다. 무위는 중국 사상에서 주로 도가(道家)가 제창한 인간의 이상적(理想的)인 행위를 가리킨다. 무위는 자연법칙에 따라 행위하고 작위를 하지 않는다. 중국의 불교에 도교적 성격이 결합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나 신라 때 세워진 사찰에 무위라는 이름이 붙으니 신기하다.

우리는 유위를 하면서 살아간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겠으나 인간은 세상을 나누고 구별한다. 나눔과 구별을 유지하기 위해 세상에 손을 대는 유위를 반복한다. 그러나 원래 세상에 유위는 없다. 그대로 두면 될 텐데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인위를 들이대면서 세상을 더욱 망가뜨리는 게 인간의 모습이다. 

무위라는 이름 덕분일까? 무위사는 한 점의 허세나 치장, 허튼 구석 없이 단정하다. 꾸민 아름다움이 없어서 건물과 공간들에도 무위가 깃들어 있고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진리는 원래 단순하고 명쾌한 것, 무위사의 모습이 그렇다. 그래서 그곳에 가면 세속에서 켜켜이 쌓인 무겁고 버거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해탈문에서 바라본 무위사는 건물의 지붕과 월출산의 능선이 나란하다. 그래서 절 너머에 산이 있으나 산이 없어 보인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존재가 없다는 무언의 가르침처럼 느껴진다.

사실 무위사는 이름에 맞지 않게 조선시대 때는 본 절에만 스물세 동의 건물과 서른다섯 개의  속암을 거느릴 정도로 대찰이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 큰불이 일어나 많은 건물이 불타 사라졌다. 인간이 스스로 비운 게 아니라 자연이 비웠는데 그렇게 덜어내고 보니 더욱 절다워졌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위에 실어 전하는 절처럼 되었다. 그래서 무위사는 비워서 아름다운 절이 되었다. 20세기 후반에 해탈문·분향각·천불전·미륵전 등을 채웠으나 채움은 최소화되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계단으로 조금씩 높아진 사찰 안 정면에 곧바로 극락보전이 보일 정도로 조촐하다. 

무위사 해탈문. 해탈문 끝에 보이는 곳이 극락보전이다. 해탈을 해야 극락에 간다는 뜻 같다.

무위사의 으뜸은 극락보전이다. 1430년에 세워졌으니 600년이 되었다. 지어졌을 때에는 단청이 있었는지 기록에 없으나 지금의 극락보전에는 단청이 없다. 그 모습이 마치 득도한 뒤의 부처님처럼 꾸밈이 없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으나 단아하며, 기단에 쌓인 돌들도 돌을 다듬지 않고 생긴 그대로 쌓았으니 기단의 돌마저도 무위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국보로 지정된 목조 건축물이 24점이고, 이 중 절에 있는 목조 건축물이 15점인데 대부분의 국보 건축물들은 송광사·해인사·부석사·화엄사 등 큰절들에 있다. 작은 사찰인 무위사에 국보 목조 건축물이 있는 것은 매우 예외적이다. 그러나 절의 규모와 상관없이 무위사 극락보전은 국보로 지정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무위사의 자랑, 극락보전. 극락보전과 배경이 아주 평화롭게 어우러진다.

무위사에 대웅전이 없으니 극락보전은 대웅전의 역할을 한다. 극락이 서방에 있다고 해서 극락전은 보통 절의 서쪽에 자리를 하는데 무위사 극락보전도 서쪽 정방향은 아니지만 서북쪽에 자리를 잡았다. 해는 동쪽이 아니라 동남쪽에서 뜨니 무위사 극락보전은 하루 종일 해를 보면서 있다. 아마도 예전에는 극락보전 옆에 다른 건물들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소실되고 용케도 극락보전은 살아남아 이제 홀로 되었다.

백제 지역 건축의 특징 중 하나는 기둥 높이에 비해 주간(柱間)의 간살이가 넓다는 점인데 극락전은 3칸×3칸 규모로 정면 중앙 칸이 양옆 칸보다 약간 좁은 것이 특징이다. 극락보전은 건축사적으로도 유의미하다. 극락전이 국보로 지정될 만큼 중요성을 인정받은 것은 조선시대 초기에 세워진 주심포계 건축 중 가장 발전된 구조, 즉 완성기의 형식을 띠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의 주심포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우미량(牛尾樑), 허점차 등의 부재가 사라지고 측면 기둥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구조 체계가 합리화되어 하나의 건축 양식이 정착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맞배지붕 구조에서 처마를 깊게 해 바람과 비가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구성했다. 측면의 박공에서 보이는 노출된 구조를 보면 솟을합장은 중도리만 지지하고 도리간을 연결하지 않아 점차 사라질 부재임을 암시하지만 꼭 필요한 부재만 사용되어 간결하고 짜임새 있는 건물의 면모를 눈으로 실감하게 한다. 또한 극락보전의 측면의 기둥과 보가 만나 이루는 공간 분할의 절제된 아름다움은 무위사 방문의 백미다.

눈 내린 무위사 일주문. 강진에 눈이 오는 일은 꽤 드물어서 눈 쌓인 무위사는 매우 이국적이다.

극락보전 안에 목조 아미타 삼존 불상(보물 제1312호)이 모셔져 있는데 중앙에 아미타불, 오른쪽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 왼쪽에 보관을 쓴 관음보살이 있는 전형적인 아미타 삼존상이다. 양쪽의 두 보살은 각각 바깥쪽 다리를 늘어뜨린 자세를 취했다. 원래 목조상으로 금물이 칠해져 있으며 모두 얼굴선이 부드럽고 단아하며 기품이 있다. 얼굴이나 옷자락의 표현 등을 볼 때 고려 후기 불상의 조각 솜씨가 엿보이는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불상이다.

불상 뒤의 아미타 삼존도(국보 제313호)는 성종 7년(1476년)에 그려진 것으로, 조선시대 벽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며 조선 초기 불교미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부드러운 붉은색과 녹색 계통을 주조로 한 채색, 화려하고 섬세한 묘사 등이 고려 불화와 많이 닮았다. 그러나 두 협시 보살의 키가 부처의 어깨쯤까지 올라와 있고 또 화면 위쪽 좌우에 세 명씩, 여섯 나한의 얼굴이 그려진 점은 고려 불화와 다른 모습이다. 이는 모든 보살이 부처의 무릎 아래에 배치되는 엄격한 상하 구도의 고려 불화와 보살과 나한 등이 부처를 빙 둘러 화면 가득히 배치되는 16세기 이후의 불화와도 다른 조선 초기 불화의 특징이다. 극락보전의 그림에는 남다른 전설이 있다. 

극락보전을 완성한 후 백일기도를 드리고 있던 어느 날, 남루한 차림을 한 노승이 절에 찾아왔다. 그는 법당에 벽화를 그리겠다고 하더니 49일 동안 어느 누구도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다. 노승은 법당에 들어가더니 문을 모두 걸어 잠근 후 한 번도 나오지도 않았으며 음식도 달라 하지 않았다. 문제는 어떻게 먹고 사느냐인데 궁금증을 참지 못한 주지 스님이 문틈으로 법당 안을 엿보았더니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다 그린 후 막 관음보살의 눈에 눈동자를 그리려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인기척을 느낀 파랑새는 붓을 떨어뜨리고 어디론가 날아가버려 지금도 후불탱화의 관음보살 눈에 눈동자가 없다는 것이다.

작은 계곡에 너른 마당이 있고 그곳에 무위사가 들어섰다. 그래서 무위사는 산세에 맞춘 절처럼 느껴진다. 세상살이 이렇게 맞춤형 삶이 있겠느냐만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산에 맞춘 무위사처럼 살아간다면 그 삶 역시 인공이 없이 소박하고 단아하지 않을까 싶다. 월출산은 바위가 많은 험한 산이지만 무위사를 둘러싼 능선들은 야트막하고 부드러우니 백제인의 미소를 보는 것 같다.

해탈문 들어서기 전에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향로봉 못 미쳐 억새밭이 나타난다. 늦가을 쓸쓸한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를 보노라면 삶도 쓸쓸해진다. 그러나 삶이란 화려해지고 싶을수록 더욱 쓸쓸해지는 법. 쓸쓸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게는 화려함에 대한 결핍이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무위사에 가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번 호를 끝으로 이종호 박사의 <공간이 마음을 움직인다> 연재를 마칩니다.


이종호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대학에서 공학 박사 학위와 과학 국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등에서 연구했다.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유네스코 선정 한국의 세계문화유산』(전 2권) 등 100여 권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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